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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독립운동가 이민화(李敏華)선생
관리자
조회수 : 1743   |   2012-12-28

1월의 독립운동가 이민화(李敏華)선생
(1898.1.13 ~ 1923.9.13) 

◈ 독립군 양성의 명장, 청산리 승전의 숨은 영웅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민화 선생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북로군정서 교성대 소대장으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선생은 1898년 충남 아산군 염치면에서 태어났다. 충무공 이순신의 11대손인 선생은 어릴 때부터 충무공의 무훈을 마음에 새겼고, 결혼 후 1917년 12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선생의 망명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세영(이천민)의 영향 받은 것으로 보인다. 충무공의 후손으로 일제에 항거할 것을 다짐하고 망명을 결행한 선생은 무장투쟁을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삼고 군사간부로서의 능력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만주지역은 1911년 삼원포 추가가의 신흥강습소로부터 시작하여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의 요충지였다. 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배출된 3천5백여명의 졸업생들은 만주 무장투쟁의 주역으로 이후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선생은 1920년 왕청현 십리평의 군사간부학교인 사관연성소 제2구대장으로 생도를 통솔하면서 교관으로 활동하였고, 북로군정서에서 가장 강력했던 엘리트 군대인 교성대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봉오동전투 패전에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작전’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독립군 부대들의 근거지 이동이 시작되었다. 북로군정서는 사령관 김좌진의 지휘 하에 의란구, 연집강을 거쳐 청산리로 향했다. 선생은 청산리 일대에서 전개된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어랑촌 등지에서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을 상대로 수차례의 전투(청산리 전역)에 김훈, 백종열, 한건원과 함께 종군장교로 참여하였다. 

 첫 전투였던 백운평전투에서 선생이 이끈 부대는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천수평전투에서는 천수평 남방고지를 선점하여 적을 섬멸하였으며, 어랑촌전투는 어느 전투보다 치열하게 싸웠다. 선생은 맹렬한 기세와 대담한 투지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봉오동전투에 이어 청산리전투에서도 크게 패한 일본은 한국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사실상 간도지역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듬해 3월 대부분의 독립군이 이만을 거쳐 러시아 자유시(알렉쎄호스크)로 이동하였고, 러시아령지역의 조선인 빨치산 부대와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사할린의용군)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으로 대한의용군의 활동은 물거품이 되었고, 수많은 독립군들이 참사로 희생되었다.

 선생은 1923년 9월 13일 노령에서 북만주로 귀환 도중 밀산에서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중국 토비와 교전 중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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