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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일보] 인문기행-경기도의 전통사찰8] '큰법당' 한글 현판, 1천6백년 불교사 파격… 남양주 봉선사
관리자
조회수 : 683   |   2022-04-26


◇봉선, 선왕의 덕업을 받들어 모시다.
봉선사는 고려 969년(광종 20)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이 창건해 운악사(雲岳寺)라 불렸고, 세조가 승하하고 광릉(光陵)이 조성되면서 원찰로 중창되며 봉선사(奉先寺)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나라를 대표하는 국찰의 기능과 역할을 해왔다. 세조의 영정을 봉안한 숭은전(뒤에 봉선전)으로 홍살문과 하마비가 세워지고, 예종과 성종의 각별한 지원과 관심을 받았다. 특히 1551년(명종 6)에 선종(禪宗)의 봉은사(奉恩寺)와 더불어 교종(敎宗)의 수사찰(首寺刹)로 승격되면서 봉선사는 교종 본찰(本刹)의 위상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불탔지만 다시 중창되어 사격(寺格)을 유지할 수 있었고, 1790년(정조 14)에는 전국 사찰을 총괄하는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가 되어 함경도 지역의 사찰을 관장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특히 1902년(광무 6) 원흥사(元興寺)를 대법산(大法山)으로 하고 전국 16개 사찰을 중법산(中法山)으로 정할 때 경기좌도(京畿左道)의 수사찰이 되었고, 1911년 일제에 의한 사찰령(寺刹令)으로 전국의 사찰이 30본산로 구역될 때 봉선사는 경기 북부 일원의 사찰을 관장하는 본사(本寺)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어 본사로서의 사격을 잃었다가 1968년 대한불교 조계종의 마지막 제25교구 본사가 되어 한강 이북의 사찰들을 관장하는 교종의 으뜸사찰이다.

 


◇‘큰법당’ 한글 현판이 준 문화적 충격
봉선사가 보통의 절집과 다른 것은 절집 중심에 ‘大雄殿’ 현판이 아닌 ‘큰법당’이라 큼지막하게 써 붙인 한글 현판이었다. 1980년대 초 이를 처음 보고 느낀 신선한 문화적 충격은 분명 봉선사를 매력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개 절집의 가장 큰 중심법당을 큰법당이라 부르지만 ‘큰법당’이라 한글 현판을 저렇게 당당하게 써서 붙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천600년 동안 그 당연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충격이었다. 이러한 당연함을 당당히 실천한 사람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독립운동가이자 역경사업에 헌신한 운허(耘虛, 1892~1980) 스님이다. 속명이 이학수(李學洙)로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와 같은 마을에서 자라 함께 공부한 8촌 형이다. 운허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이자, 불경의 한글번역과 강원교육을 통해 후학을 양성한 큰스님으로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중흥조라 할 수 있다.

운허스님은 1970년 큰법당을 세우며 서예가 운봉 금인석(琴仁錫, 1921~1992) 교수에게 한글 편액과 한글 주련을 부탁하였다. 큰법당은 겉에서 보면 영락없는 목조건축물인데, 실상은 철근 콘크리트로 정교하게 만든 건물이라 또 한번 놀라게 된다. 큰법당은 근대건축 재료와 구조로 전통성을 표현하고자 한 60~70년대 기술을 대표하는 사례로 근대건축사적, 불교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봉선사가 근대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첫 자리는 역경사업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 빛나는 자부심은 한글로 된 ‘큰법당’과 한글 주련들 그리고 운허스님이 한글로 쓴 일주문의 ‘운악산 봉선사’ 큰 글씨로 당당히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문 독경이 아닌 우리말 아침예불이 봉선사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는 불경의 한글번역을 넘어 의례의 한글화, 대중화를 선도하는 봉선사라는 사실이다.


 

◇봉선사의 보물들
봉선사는 국난을 온전히 겪은 절집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불타고 1950년 6.25전쟁으로 불타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봉선사가 한반도 북쪽에서 서울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봉선사 보물은 이런 국난에도 살아남은 5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봉선사 동종, 삼성각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범종은 그리 많지 않다. 1469년(예종 원년)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제작된 높이 238㎝의 커다란 봉선사 동종은 음통은 없지만 두 마리 용이 고리 구실을 하는 전형적인 한국 범종의 모습이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절터에 동종 하나 덩그러이 놓여진 사진은 국난과 함께 한 봉선사를 상징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전각인 삼성각은 1926년 월초 스님이 건립한 것으로 현재 봉선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셈이다. 이곳의 독성도와 칠성도는 2011년 경기도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902년에 건립된 흥인지문 밖 원흥사가 폐지되고 창신공립보통학교가 되면서 월초 스님이 봉선사로 옮겨온 것이다.

봉선사에는 범종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비로자나 삼신괘불도가 있다. 1735년(영조 11) 상궁 이성애(李性愛)가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1669~1735)의 명복을 빌며 제작한 괘불이다. 밝고 화사한 색채와 굵고 대담한 묵선으로 묘사된 인물들의 움직임과 옷자락의 자연스러움은 왕실발원 불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보물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물이 봉선사에는 있다. 그것은 올곧은 정진과 교학의 가풍이다.

 


◇봉선사의 가풍을 만들 사람들
봉선사 가풍을 만든 이는 조선 말기 이래 봉선사를 대표하는 홍월초(洪月初, 1858~1934) 스님을 꼽을 수 있다. 근대불교사에서 가장 모범적인 승려의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남·북한총섭을 역임하였고, 불교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명진학교(明進學校)의 설립자였다. 전통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새롭게 부는 일본불교의 바람을 맞으며 불교의 발전을 모색했던 인물이었다. 월초스님의 업적 가운데 특기할 것은 ‘봉선본말사지(奉先本末寺誌 1927)’의 편찬을 꼽을 수 있다.


홍월초 스님

본사 봉선사를 비롯하여 회암사·흥국사·불암사 등 24개 사찰의 사지였다. 당시 봉선사 강사였던 안진호(安震湖 1880~1965)에게 명하여 편찬케 하였다. 이후 안진호는 많은 사지를 편찬하였다. ‘봉선본말사지’는 이듬해 만해 한용운의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 1928)’으로 이어졌다. 6.25전쟁으로 봉선사와 강원도 건봉사가 불타고 난 뒤 이들의 사지 편찬은 역사적 혜명으로 일컬을 만큼 위대한 업적이 되었다. 또한 1934년 월초 스님은 열반하기 직전 자신의 소유토지 2만6천여 평을 모두 봉선사에 기증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이 설립되었고, 손상좌 운허 스님이 그 뒤를 이어 봉선사를 이끌었다.

 


◇월초 스님의 또 다른 손상좌로 운암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이 있다.
대학시절 가장 감명깊게 있은 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대기를 쓴 님 웨일즈의 ‘아리랑’이었다. 본명이 장지락(1905~1938)으로 알려진 파란만장한 김산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이었다. 김충창은 김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성숙이라는 법명을 스승 홍월초가 주었다. 그렇게 봉선사는 홍월초, 이운허, 김성숙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 정신과 교학의 가풍을 이어왔다.


운암 김성숙

특히 역경원장을 역임한 운허 스님은 대장경의 한글 번역을 봉선사에서 이끌었고, 그 원력을 이어 받은 제자 월운(月運) 스님은 1965~2002년까지 37년에 걸쳐 해인사 소장 고려대장경을 총 318권의 한글대장경으로 완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렇게 봉선사는 역경사업을 통한 불교대중화와 서당운영을 통해 젊은 인재들을 배출하며 교학불교에 뛰어난 봉선사의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승려들의 보편적 복지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등 불교의 현대화에도 모범을 보이고 있다. 그렇게 광릉의 봉선사는 광릉숲과 더불어 더욱 빛나는 가풍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장 페이스북

출처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http://www.joongb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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