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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S 불교방송] [BBS 뉴스와 사람들] 민성진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 회장 “항일 독립운동 이어 해방 후엔 민주화 위해 헌신... 좌우 이념 넘어선 중도(中道)의 길 실천”
관리자
조회수 : 493   |   2022-04-26


BBS 불교방송 정통 시사 대담 프로그램 ‘뉴스와 사람들’

진행 : 김봉래 BBS 전법후원국장

출연 : 민성진 (사)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 회장

방송 : 2022년 4월 17일(일요일) 저녁 6시20분(BBS 라디오)


김봉래 : 우리 사회 명사들과 현안을 짚어보고 해법을 모색하는 BBS 뉴스와 사람들의 김봉래입니다. 한국불교 종단을 대표하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독립과 문화예술 등 5개 분야에서 우리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12명의 불교인을 선정하고 집중 홍보하기로 했는데요,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교계 스님 가운데 항일 독립운동을 하신 분으로 유명하신 용성스님과 만해스님 그리고 초월스님이 있습니다. 그만큼은 알려지지 못했지만 스님 출신 독립운동가가 또 계신데요. 바로 운암 김성숙 선생이십니다. 운암 선생은 3.1운동 때 옥고를 치른 후 중국으로 진출해서 항일 독립운동을 계속하셨고 해방 후 귀국해서는 민주화 운동에 적극 동참하셨습니다. 선조들의 멸사봉공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가짐이 오늘날 당면한 우리들의 고난과 갈등을 헤쳐나가는 바탕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래서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의 민성진 회장님 모시고 말씀 나눠보겠습니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김봉래 :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민성진 회장님을 불교방송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민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민성진 : 네. 안녕하세요.

김봉래 : 오랜만입니다. 먼저 청취자들께 간단한 인사 말씀 주시죠.

민성진 : 안녕하세요. 뉴스와 사람들 청취자 여러분. 태허스님기념사업회를 하고 있는 운암 김성숙기념사업회 민성진 회장입니다.

김봉래 : 네. 반갑습니다. 자. 스님 출신의 항일 독립투사 바로 우리 운암 김성숙 선생을 수식하는 말인데요,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를 하셨고 봉선사에 계시던 월초스님으로부터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으셨습니다. 올해로 열반하신 지가 꽤 오래되셨죠.

민성진 : 네. 53주기가 되었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지난 12일 국립현충원에서 53주기 추모제가 열렸는데 전체적으로 어떻게 진행이 됐나요.

민성진 : 네. 4월 12일 53주기 추모제를 많은 분들의 관심과 성원 덕분에 무사히 잘 치렀습니다.

김봉래 : 내빈들도 많이 오셨죠.

민성진 : 저희 기념사업회 이사인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당대표하고, 김대중 대통령 후손인 김홍걸 의원, 그 다음에 함세웅 신부님이라고 항일 독립운동가 선열 단체 회장님 모시고 또 BBS 불교방송 이선재 사장님께서 오셔서 아주 그냥 뜻 깊은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김봉래 : 그래요. 이게 녹화가 돼서 불교방송에서도 송출이 될 예정인데요. 스님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신 운암 선생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우선 간단하게 좀 소개를 해 주실까요.

민성진 : 운암 김성숙 선생은 태허스님으로, 봉선사 월초스님의 가르침을 받던 중 한용운, 손병희, 김법린 선생 등의 영향으로 3.1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조선의용대 활동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 국무위원을 역임하시고 광복 이후에는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혁신계 인사로 활동하셨습니다.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 운동을 하셨던 정치인이었습니다.

김봉래 : 독립운동가이시면서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 운동을 적극 함께 했던 선지식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겠습니다. 운암 선생님께서 스님으로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그때 김산인가 하는 분과의 인연 그런 부분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마는.

민성진 : 운암 선생이 아주 대중들한테 연설을 잘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중국에서 유학생들을 모아놓고 독립운동 관련해서 연설을 하시다 보면 나이 어린 그 때 김산(=장지락) 선생이 운암 선생에 매료가 돼서 평생 제일 존경하는 스승으로, 이거는 님 웨일즈 <아리랑>의 김산에 관련된 그런 책자인데요, 거기에 보면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으로 묘사가 되고 있거든요.

김봉래 : 아 운암 선생이요.

민성진 : 그 김충창이 바로 운암 김성숙 선생입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그 정도로 젊은이들에게도 그만큼 호소력이 있었다 이런 말씀이시네요.

민성진 : 그래서 지금 민주화 운동 관련해서 많은 분들이 님 웨일즈 <아리랑>은 거의 다 읽으셨을 텐데 거기에 나오는 김충창이 운암선생이라는 거는 잘 모르실 것 같은데.

김봉래 : 이번 기회에 저희들도 분명히 알았습니다. 기념사업회는 어쨌든 운암 선생 선양사업을 집중적으로 하고 계신 거 아닙니까. 사단법인은 2005년에 설립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민성진 : 2005년 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17년째 해오고 있고요. 특히 올해는 큰 줄기 선양사업이 추모제를 필두로 전국에서 주로 활동하셨던 선생의 자료를 발굴 수집하여 학교에 발표하기 위해 6월에 한중 학술심포지엄이 계획돼 있거든요. 또한 중국의 운암 선생 후손들이 연로하셔서 그 분들의 기록을 남기 위해서 광복절에 KBS랑 BBS가 특집으로 다큐를 방송 예정입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스님의 다큐가 저희 BBS 불교방송을 통해서도 송출이 되는 건데, 운암 선생은 어쨌든 1898년 평북 철산에서 태어나셔서 1969년에 서울에서 돌아가셨죠? 71세로. 기미년에 옥고를 치르셨고 26세 때는 중국으로 망명을 해서 광복 활동에 동참하시고 또 임정 활동에도 참여하시고, 귀국한 후에도 정말 민족 통일을 위해서 또 사상적인 분열을 막기 위해서 상당히 중도적인 시각에서 불교적인 시각에서 평생을 일관하지 않으셨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민성진 : 또한 운암 선생이 주로 활동하시던 중국을 무대로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이하여 운암 김성숙 선생과 중국인 부인 두쥔후이 여사의 혁명과 사랑을 웹툰으로 제작하여 한중 동시 포털 사이트에 연재할 예정입니다. 그 외 해마다 젊은 층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시키기 위한 UCC 공모전, 운암 선생 발자취를 찾기 위한 봉선사, 용문사 탐방 행사가 계획되어 있습니다.

김봉래 : 운암 선생이 우리 민성진 회장님의 외조부이신 걸로 알고 있거든요.

민성진 : 예. 저희 어머님이 운암 선생님의 장녀이십니다. 즉 저는 운암 선생의 외손자 됩니다.

김봉래 : 그런 저런 인연 때문에 운암 선생 선양 사업에 투신하게 되신 것 같습니다.

민성진 : 운암 선생 선양 사업을 하게 된 이유가 제가 2004년도에 통신사 기자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임시정부 요인 관련해서 자료를 보게 됐거든요. 그래서 그 다음 해에 언론사 다니는 걸 포기하고 기념사업회를 만들기로 시작하게 됐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용문사에서 출가하시고 봉선사에서 수행을 하셨는데, 봉선사 6허 스님 중에 3허 스님이 운암 선생 가족입니다. 친동생은 김성호라고 능허스님이 친동생이고, 또 불암사 주지를 하시던 만허스님은 운암 선생의 사돈이고. 그래서 스님으로 이렇게 활동을 하시다가 월초스님 지시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관계로, 월초스님 지시로 운허스님은 국내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독립운동을 하고 태허스님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중국에 가는 관계로 상좌도 없고 지금 봉선사에서 거의 맥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해방이 되어서 들어오실 때는 임시정부 요인의 한 부분으로 이렇게 들어오신 거죠?

민성진 : 네. 미군정에서 개인 자격으로 들어오라고 그래서 임시정부 환국 2진으로 군산 비행장에 들어오셔서 군산에서 트럭을 타고 서울로 오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김봉래 : 네. 3.1 독립운동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여러 가지 독립운동 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셨을 것 같은데, 민성진 회장님이 아실 때 어떤 부분들이 어려우셨을까요.

민성진 : 불교 유학생으로 중국에 진출을 하셔서 교민들, 그러니까 유학생들을 모아 독립운동에 나라를 뺏긴 설움을 서로들 하소연하다 보니까 나라를 되찾는 데 일조를 하자는 그런 다짐도 했을 거고, 그러다 보니까 의열단, 조선의용대, 임시정부에 참여도 하셔서 해방을 위해 노력을 했는데, 그 때 상황으로는 특히 중국에서는 공산당하고 장개석 정부하고 눈치도 봐가면서 거의 남의 땅에서 임시정부를 운영하다 보니까 애로사항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들하고 눈치 봐가면서 지원받으면서 하는 그런 일들을 지금의 일부는 빨갱이라고 그러고 공산주의자라고 그러고 이렇게 매도를 하는데, 좀 안타깝고. 최초로 정부의 골격을 갖추고 한 게 충칭 임시정부 때인데요, 충칭 임시정부 때 우익 쪽의 김구 선생과 좌익 쪽에 있는 김원봉 선생을 설득해서 통합을 한 최초의 임시정부를 만든 분이 운암 김성숙 선생이라고 들었습니다.

김봉래 : 중국에서 우리가 해방을 맞으면서 들어오실 때도 뭔가 말씀을 남기셨더라고요. 보니까. 임정 쪽에. 서로 화합해서 잘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씀을 나누셨는데, 중국에서 결혼을 하시게 되지 않습니까. 두군혜(杜君慧, 두쥔후이) 여사님. 그래서 자녀 셋을 두시게 되는데 그게 광동꼬뮌에 참여를 했다가 실패하고 두군혜 여사 집에 피신을 하면서 뭔가 인연이 되지 않으셨나요?

민성진 : 그게 아니라 두쥔후이 여사는 중국의 한국어로 말하면 유관순 열사 정도로 존경을 받는 인물인데요, 두쥔후이 여사 친구가 주은래 선생의 부인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친한 친구가. 그래서 주은래 선생 중매로 이렇게 두 분이 만나셨다고 어머님한테 얘기를 들었어요.

김봉래 : 그렇군요. 두군혜 여사 집에 피신한 것과는 별개로.

민성진 : 그 이후로 같이 두군혜 여사도 몇 년 전에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으셨지만 같이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을 상대로 싸우는 공통점이 있다 보니까 두 분이 같이 독립운동을 하신 것 같습니다.

김봉래 : 1945년 해방 이후에 운암 선생이 국내에 오셔서는 정치에 이렇게 관여를 좀 하시지 않았습니까. 몽양 여운형 선생과 함께 근로인민당 조직하시기도 하시고. 그런데 어쨌든 해방 정국에서 좌우 합작 운동을 펼치는 그런 중요한 몫을 담당하셨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 조금 설명을 해 주신다면요.

민성진 : 해방되고 나서 이승만 정권에서 독재자들하고 맞서서 싸우다가 옥고도 치르시고 했는데, 여운형 선생이랑 같이 근로인민당도 결성하시고 또 여운영 선생이 피살당하는 바람에 그것도 좌절하시고, 또 통사당 당수도 하시고 신안당에서 활동도 하셨는데, 지금 더불어민주당 뿌리인 신민당 창당 주역으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이 신민당 창당을 하셨는데, 그 때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시다 돌아가시게 됐습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어쨌든 민주화 세력의 뿌리를 이루신 분이고, 그래서 돌아가신 곳 집 이름이 피우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비를 피하는 집이다 이랬는데, 그 인연이 어떻게 되는지요.

민성진 : 몽양 여운형 선생이랑 이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정당 결성을 하고 하다가 그 때 근로인민당의 재정부장을 하던 구익균 선생이라고 계셨거든요. 그래서 너무 집도 절도 없이 이렇게 사시니까 구익균 선생이 자기 땅을 내주셔가지고 11평짜리 조그마한 집이라도 짓게끔 이렇게 도와주셨거든요. 그래서 집 짓는 거를 모금도 해서 이렇게 지었는데, 노산 이은상 선생이 비나 피하라고 피우정으로 명명을 해 주셔서 그 피우정이라는 이름의 방이 봉선사에도 피우정이 있거든요. 그래서 전에는 밀운스님이 거기서 거처를 하시다가 지금은 다른 요사채로 옮기셨는데요. 

김봉래 : 어쨌든 71세에 피우정에서 돌아가시게 되는데 영결식을 조계사에서 봉행하게 되었더라고요. 

민성진 : 천식으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정부에서는 급하게 사회장을 치르셨는데, 장지는 봉선사의 운허스님이 나서서 조계사 주지 스님께 말씀을 드려서 조계사에서 영결식을 하게끔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김봉래 : 아. 그렇군요. BBS 뉴스와 사람들 오늘은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의 민성진 회장님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김성숙 선생, 운암 선생이 일생을 통해서 참 많은 분들을 만나셨을 텐데, 그래도 가장 긴밀한 분은 어느 분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민성진 : 아마도 몽양 여운형 선생과 긴밀히 활동하셨을 것 같은데요. 선생의 피습으로 꿈꾸시던 모든 활동이 위축되셨을 것 같고. 그렇게 서운해 하셨던 분은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 싸웠던 사람을 독재 정권에서 탄압을 받으셨고 옥고를 치루니 좀 서운함이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김봉래 : 제가 기념사업회 홈페이지를 보니까 두 부부의 친구로서 동지라고 정율성 작곡가를 표시해놨더라고요. 정율성 작곡가는 어떤 분이셨나요.

민성진 : 그 분은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분인데, 그 분이 광저우로 피신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 운암 선생의 부인이신 두군혜 여사께서 그 분을 돌봐주시고 했다는 기록이 있더라고요.

김봉래 : 어쨌든 운암 선생은 조국 광복을 위해서 일제에 항거를 하고 또 정의와 대중 복리를 위해서 모든 사회악과 싸우면서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사상과 지조로 사셨다, 이렇게 돼 있는데, 사상과 지조로 사셨다고 하니까요, 운암 선생의 평소에 가르침이나 유훈 같은 것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민성진 : 임시정부 시절 쓰신 유묵으로도 남겨져 있고요, 혁명일기에도 쓰고 계신데, “위건설자유행복지국가이분투(爲建設自由幸福之國家而奮鬪)”라고 “나의 유일한 명분은 민족국가의 독립과 민주체제의 확립과 행복한 사회건설이었다. 나는 나의 이러한 대의명분 하에 일생을 바쳐왔고 아직도 이런 목적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이건 1964년 혁명일기에 쓰신 글입니다.

김봉래 : 아. 그렇군요. 민족의 독립, 민주체제의 확립, 그리고 행복한 사회건설, 어떻게 보면 세 번째 것은 불국토 건설하고 맥락이 닿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혹시 선생께서 가장 가까이 했던 어떤 명구나 부처님 말씀이나 뭐 이런 게 있을까요.

민성진 :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면서도 품속에 도첩, 계첩, 임명장, 이런 불교계에서 받았던 모든 증명을 증명서를 해방 이후에도 갖고 오셨거든요. 그래서 저희 기념사업회에 액자로 잘 보관을 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거는 국가기록물로 등재해서 이렇게 보관을 하려 합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어쨌든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생각하시면서 할아버지의 어떤 점을 가장 존경하게 되시는지요.

민성진 : 자신의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려운 동지들을 위해 지원받은 돈을 나눠주는 운암 선생의 모습과 무슨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묵묵히 목적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이 지금 생각해 보니까 굉장히 존경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김봉래 : 그렇군요. 어쨌든 아직까지도 우리가 완전한 조국을 찾지는 못하고 반으로 갈라진 조국 상황을 운암 선생께서는 지금 어떻게 바라보시고 또 어떻게 풀어가야 한다 이렇게 말씀을 주실까요.

민성진 : 운암 선생이 살아계실 때 늘 말씀하시던 부분인데, 정치인들이 좌고 우고 따질 것이 아니라 이념 싸움은 나라가 통일됐을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니 좌우 통합, 좌우 협치하여 통일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운암 선생 말씀 따라 통일된 이후에 좌든 우든 따지면서 일단 국민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김봉래 :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이런 말씀이시잖아요. 그런데 굳이 또 정치적으로 따지자면 오늘날의 더불어민주당 계열이다 이렇게 보셔야 할 것 같은데,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만 오늘날의 민주당 현실을 보면서 어떤 조언을 하실지 그런 것도 좀 궁금해요.

민성진 : 더불어민주당이 계파정치다 뭐다 해서 국민들의 정서와 생각을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의원 개인의 이익을 우선 생각하고 국민과 당을 생각하는 마음이 좀 부족한 것 같고요, 어려울 때일수록 본인들의 이익은 멀리하고 더 큰 정치를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김봉래 : 어디서나 정말 선공후사하는 그런 선열들의 정신과 삶을 본받아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2005년도 사단법인을 설립하신 이후에 꾸준히 운암 김성숙 선생 기념사업을 해오시는데, 그 동안의 성과는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민성진 : 2005년 제가 처음 기념사업회를 국가보훈처에 등록을 하면서 시작할 때는 운암 선생을 저희 가족들밖에는 사실은 몰랐어요. 독립운동가 운암 선생에 대해서는. 그런데 지금은 학계에서도 독립기념관 연구원들도 그렇고 학계에서도 많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어느 정도는 알려졌다고 말씀들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보다 체계적으로 기념사업회가 선양사업을 하기 위해 운암김성숙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고, 중국의 후손 분들이 살아계실 때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광복절 특집 다큐도 제작 중에 있고, 그 와중에 지난해 10월 큰아들인 두감, 운암 선생의 광저우 사시는 장남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거든요. 그래서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운암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하셨던 자료를 수집하고 있고,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아 중국에서 활동했던 운암 선생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신 부인 두쥔후이의 혁명과 사랑을 이룬 웹툰, 우단사련(藕断丝连)이라는 웹툰을 제작하여 광복절을 맞아서 한중 동시 포털 사이트에 연재할 계획을 또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 사드 문제로 경색된 한중 문화교류를 재개하는 가교가 될 생각입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 그러면 기념관은 언제쯤 완공이 되나요.

민성진 : 그동안 기념관 소재지가 서울 강동구 둔촌동 119번지거든요. 그래서 그 동안 추진이 좀 안 됐던 게 일자산 보훈병원 건너편의 일자산 공원인데 거기가 도시자연공원으로 돼서 시설률도 별로 안 나왔고, 이미 시설률 20% 중에 19.6%를 강동구청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거든요. 다행히 돌아가신 박원순 시장께서 거기를 근린공원으로 변경을 시켜줘서 시설률이 40%로 늘어나는 바람에 우리 기념관이 들어갈 수 있게 됐습니다.

김봉래 : 참으로 다행입니다.

민성진 : 지금 이정훈 강동구청장께서 거기 용역이라든지 공원심의위원회에 보낼 서류라든지 그런 비용, 용역비용은 강동구청에서 부담하는 것으로 해서 지금 건축 허가까지 그린벨트 변경도 해야 되고 건축 허가까지 해서 건축 허가가 나게 되면 내년 3월에도 착공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기념관 구성은 일반 독립운동가 기념관과 별개로 저희 기념관은 복합시설로, 예를 들어 안중근 기념관이나 백범 기념관은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나 백범 선생의 유물을 전시를 하는 곳인데 저희 운암김성숙기념관은 독립운동 30%, 민주화 운동을 하신 운암 선생 자료가 30%, 그 다음 나머지 40%는 시민들을 위한 복합시설로 구성이 된 복합시설이거든요. 그래서 국가보훈처에서도 굉장히 복합시설 1호가 우리 운암김성숙기념관이라고 개관 이후에 행사 때만 찾아오는 독립운동가 기념관이 아니고 늘 평상시에도 시민들이 같이 어우러질 수 있는 기념관으로서 굉장히 기대가 된다고 합니다.

김봉래 : 네. 그렇군요.어쨌든 회장님께서 2005년 이후에 많은 노력을 하신 덕분에 사옥도 만드시고 여러 가지 사업들이 굉장히 활발하게 진행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정치권에 당부하실 말씀도 계실까요. 회장님 어떻습니까.

민성진 : 정치인들은 자신의 유불리보다 국민을 먼저 생각하시고 통합과 협치를 통한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김봉래 : 네. 협치를 해야죠. 5월 10일 새로운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습니다만 신구 정치 세력 간에 갈등도 만만치는 않아요. 그리고 6월 1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또 한 번의 대결이 불가피한데 협치가 어느 정도 가능할까요.

민성진 : 다행히 요즘은 그렇게 전에처럼 이념 가지고 정치하는 시대는 끝난 것 같더라고요. 야당에 있다가 여당으로 옮기는 분들도 계시고 또 여당에 있다가 반대로 야당으로 옮기시는 분도 있고. 그래서 국민들을 위한 정책이나 자신의 생각으로 정치를 하시는 것이지 좌우니 이념이니 이런 것은 옛날 같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김봉래 : 그래요. 운암 선생께서 스님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시니 불교계 종단에 당부하실 말씀도 계실까요.

민성진 : 불교계에서는 늘 불리할 때는 호국불교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각 종단에서는 앞으로 태허스님의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근본 토대는 불교 사상과 교류였음을 생각하시고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태허스님뿐만이 아니고 용성스님, 만해스님 그 외 많은 불교계 독립운동가들 선양 사업에 각 종단이 앞장서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봉래 : 앞서 제가 오프닝에서도 간단히 소개를 드렸습니다만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차원에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불교인을 집중 조명하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그런 부분이 더 잘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운암 김성숙 선생께서 불교계 활동을 하셨을 텐데 어떤 일화 같은 거, 뭐 소개할 만한 게 있을까요.

민성진 :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서 집 안에 땅을 판 돈을 몰래 훔쳐서 신흥무관학교를 가려고 중국으로 가려던 참에 너무 나이 어린 애가 큰 돈을 갖고 있다 보니까 되돌아오게 됐거든요. 다시 살던 곳으로 되돌아오게 됐는데, 그 때 당시 김성숙 선생을 데리고 오신 분이 월초스님 상좌인 풍곡신원스님, 회암사 주지하시던 풍곡신원스님이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풍곡신원스님이 양평 용문사에 출가를 시켜서 불교하고 인연은 어떻게 숙명적인 것인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김봉래 : 앞으로 민성진 회장님 향후 원력 계획 말씀 주시는 것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민성진 : 할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대한민국이 더 자유롭고 행복한 나라가 되는 데 기여하고자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더 낮은 자세로 대한민국의 발전과 독립운동가들의 선양사업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불자들에게 또 부탁드립니다. 우리 태허스님기념사업회 이사이신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서울시장에 출마를 하시는데 불교계를 위해 노력하는 우리 송영길 후보를 좀 응원 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김봉래 : 민성진 회장님 귀한 자리에 함께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사단법인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민성진 회장님과 함께 했습니다.

김봉래 : 여러분 민성진 회장님과 함께한 오늘 이 시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민 회장님은 할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서 우리나라가 더 자유롭고 행복한 나라가 되게 하는 데 기여하겠다, 더 낮은 자세로 선양사업에 주력하겠다, 이런 말씀을 주신 것 같습니다. 좌우 이념의 대립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바탕이 바로 부처님 말씀에 있다는 소신으로 일관하신 운암 선생의 뜻을 잘 받들어서 나가야 되겠다는 다짐도 해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제작에 불교방송 보도국, 진행에 김봉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BBS NEWS 김봉래 기자(https://news.bbs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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