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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음악이 항일 무기… 중국인민해방군가 작곡한 ‘중국의 3대 악성’
관리자
조회수 : 1042   |   2020-10-12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장 맡아 일본군과 싸운 정율성


정율성은 ‘중국인민해방군가’와 ‘옌안송’ 등 360여곡을 작곡한 작곡가로 중국인의

심금을 울린 ‘3대 악성(樂聖)’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항일운동가로서

정율성을 언급하기는 의열단장 김원봉처럼 조심스럽다.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

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귀국한 뒤 월북한 인물인데 남한 출신인 정율성은

광복 후 북한으로 들어갔고 6·25 전쟁 때는 중공군으로 참전했다. 그 때문에

정율성은 이념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국내에서 그의 생애는 오래도록 조명

받지 했다. 2018년 중국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이 광복절 기념식에 중국에

거주하는 정율성의 딸 정샤오티(鄭小提)를 초청했을 때 논란이 됐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율성은 1914년 8월 27일 광주광역시에서 정해업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중국에서의 공식 생일은 1918년 8월 13일로 돼 있다. 정율성이 생년을 4년이나

늦춰 적은 이력서를 당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정율성은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외적과의 싸움에서도 최후의 결전에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승전고를

울린단다. 군대가 진군할 때 사기를 돋우는 데는 우렁찬 군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군가가 없거든….” 온종일 만돌린만 켜고 노래를 부르는

정율성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군가가 없다’는 말은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의 앞날을 예견한 듯했다.


 


●분열된 독립운동단체 대동단결 결의문 주도

정율성가(家)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맏형 정효룡(건국훈장 애족장)은 임시정부

서기로 일했고 국내에서 선전활동을 하다 옥살이를 했다. 둘째형 정인제는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국민혁명군으로 북벌에 참여했다. 셋째형

정의은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학생을 모집하고자 국내에 잠입했다. 큰외삼촌 최흥종은 평생을 나환자를 돌보는

데 바쳤으며 작은외삼촌 최영욱은 의학박사로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고모부다.

매형 박건웅(독립장)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항일운동가다.

이런 가풍 속에서 자란 정율성이 중국행을 꿈꾼 것은 자연스러웠다. 마침 셋째형

정의은이 ‘조선혁명간부학교’ 2기생을 모집하러 국내에 들어와 입학을 권유했다.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전북 전주 신흥중학을 중퇴한 정율성은 1933년 5월 8일

전남 목포항을 떠나 일본을 경유해 5월 13일 상하이 푸둥항에 도착했다. 함께

중국 땅을 밟은 이들은 모두 여섯이었는데 조카 정국훈도 있었고 1990년대에

광복회장을 지낸 김승곤도 있었다. 8개월 동안 그는 간부학교에서 군사학과

사회주의 이념을 배웠다. 매형 박건웅은 교관이었다. 1기 졸업생 중에는 시인

이육사와 석정 윤세주도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정율성은 일본인들의 전화를 감청하며 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러면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일을 맞았는데 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출신인 크리노와 교수를 소개받아 체계적인 성악 지도를

받은 것이다. 이름도 본명인 정부은에서 선율로 성공하겠다는 뜻을 담은 ‘율성’

(律成)으로 바꾸며 음악에 몰두했다. 정율성은 상하이에서 열린 독창회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정율성에게 크리노와는 이탈리아

유학을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정율성은

항일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


1937년 8월 정율성은 마오쩌둥이 홍군(紅軍)을 지휘하고 있던 산시성 옌안에 도착

했다. 그에게 옌안은 공산당의 본거지이기에 앞서 항일투쟁의 사령부였다. 옌안행

에는 먼저 그곳으로 간 ‘아리랑’(님 웨일스)의 주인공 김산과 독립운동가 김성숙의

부인 두쥔훼이가 큰 영향을 주었다. 1936년 6월 정율성은 난징에서 김산과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옌안에서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들어가 음악 공부를 계속했다.

어느 날 노신학원 문학학부 동기생인 모예(莫耶)가 노랫말을 들고 왔다. 정율성은

곡을 붙여 만돌린으로 반주도 하며 청중 앞에서 불렀다.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오르고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 마오쩌둥도 함께한 청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노래가 바로 옌안 정신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극찬을 받고 지금도

중국에서 널리 불리는 ‘옌안송’이다. 옌안송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동남아와 미국

까지 퍼져 나갔다.


●당 결정 따라 北에… 조선인민군행진곡 작곡

1938년 8월 노신학원을 졸업한 정율성은 항일군정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틈날

때마다 작곡을 했다. 그 무렵 우리 독립운동 단체들은 사분오열돼 있었다. 정율성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결의문’ 작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듬해 7월 항일군정대학 군정단에 있던 궁무(公木)의 가사에 음을 붙여 ‘팔로군

행진곡’을 작곡했다. 현재 중국군의 공식 군가로 확정된 ‘중국인민해방군가’다.

그의 노래는 중국인이 좋아하는 명곡이 됐다. 정율성에게 일제와 싸운 무기는 음악

이었다. 정율성은 노신예술학원 교수가 됐고 나중에 최초의 여성 중국 대사가 되며

저우언라이의 양녀로 알려진 딩쉐쑹(丁雪松)과 결혼, 가정도 꾸렸다.


 



1942년 정율성은 조선의용군이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던 태항산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장을 맡아 전투에 참여하고 후방 공작도 했다.

그러면서 광복을 맞았다. 정율성은 오랫동안 항일활동을 했고 부인의 조국인 중국에

남지 않고 당의 결정에 따라 조선의용군과 함께 북한으로 갔다. 북한에서는 ‘조선

인민군행진곡’도 작곡했다. 광주에 있던 어머니를 조카가 데려오자 모시고 살았다.

그러다 다시 어머니, 부인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갔다. 6·25 때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전선 위문활동을 했다.

정율성도 문화혁명을 피하지 못하고 고초를 겪었다. 자연에 묻혀 은둔하던 정율성은

든든한 후원자였던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난 해인 1976년 12월 7일 갑작스레

뇌일혈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중국의 국립묘지인 베이징 교외 팔보산혁명공묘에

묻혔다. 베이징에 살고 있는 외동딸 정샤오티(1943년생)는 광주를 찾아 음악회 등

아버지 관련 행사에 참석하고 한중 우호활동에 힘쓰고 있다.

동요, 민요, 군가, 뮤지컬, 오페라, 영화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남긴 정율성의

업적은 현대 중국의 3대 음악가로 불리는 녜얼(耳·중국 국가 작곡가), 셴싱하이(星海)

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가 창작한 동요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2000년대에 들어 한중 양국에서 정율성이라는 이름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평양순안공항에서 연주된 곡은 정율성의 ‘조선의용군행진곡’이었다.


2005년 중국 전승절 60주년에 신중국 건국 100인의 영웅 중 여섯 번째에 오른

이름은 정율성이었다. 중국 하얼빈에는 정율성기념관이 세워졌다.

●광주시, 생가 복원 등 추진… 하얼빈엔 기념관

우리도 그가 자란 광주 양림동에 정율성거리를 조성해 사진과 작품을 전시하고

생가도 단장했다. 기념사업회도 구성돼 각종 행사를 열고 있다. 하지만 최근 찾아본

정율성거리는 훼손이 적지 않았고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직도 개인 소유인 생가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정율성 음악제도 매년 열려 왔지만 올해는 코로나19로 진행이 더뎌지고 있다.

광주시는 지난 5월 생가 부지 매입과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양림동에는 기념관을

짓고 아버지와 형제들의 본적지로 돼 있는 불로동에는 역사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선양사업만큼 중요한 향후 과제는 그의 이념과 행적을 둘러싼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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