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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운암
[오마이뉴스]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이고 보수야당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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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조회수 :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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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6
▲ 1962년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무식에서 연설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모습. 당시 최고회의가 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입주해 있었다. ⓒ 대통령기록관
[운암 김성숙 평전 48회] 김성숙은 극단보다는 통합과 연대를 중시해 실천해 왔다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 집단은 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정정법)이란 것을 제정했다. 구정치인 및 군내 반대파의 손발을 묶기 위해 마련한 악법이었다. 침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개인생활도, 나라 사정도 침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박정희가 야당의 윤보선을 15만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행적을 둘러싸고 사상논쟁이 벌어졌지만 선거는 그의 당선으로 귀결되었다.
▲ 영등포고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 관련 신문 기사(경향신문, 1964. 3. 27) 1964년 3월 27일 900여 명의 영등포고 학생들은 중앙청 앞까지 진출하여 박정희 군사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경향신문사 정부가 대일굴욕회담을 강행하고 1965년 6월 공화당 단독으로 국회에서 비준되자 이에 반발하여 윤보선 중심의 민중당내 강경파가 의원직을 사퇴하고 1966년 2월 신한당을 창당했다. 신한당은 윤보선을 총재와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전국 각지를 순회, 공화당 정권의 비리를 폭로ㆍ규탄하는 대중집회를 열었다. 신한당은 5ㆍ16 이후 가장 강경한 야당의 모습을 보였다. 김성숙은 이런 신한당에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윤길중ㆍ박기출ㆍ임갑수ㆍ김기철ㆍ한왕균ㆍ이명하ㆍ정태영 등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신한당에 참여한 것이다. 김성숙을 비롯해 이들 혁신계를 떠나 보수야당이란 배를 바꿔 탄 배경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1964년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의 체제가 출범할 무렵으로 군사정부의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을 때였다.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혁신정당의 활동에 제약이 심했다. 그래서 일부 혁신계 인사들은 보수야당이란 배를 잠정적으로 올라탐으로써 자체의 진용을 정비하고 시간을 갖는 한편으로, 보수ㆍ혁신의 합작을 통해 보수야당의 체질을 개선해 보다 효과적인 대정부 투쟁을 벌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판단을 내렸다는 설명이다. (주석 5) ▲ 우리나라 유일한 승려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운암 김성숙 선생 우리나라 유일한 승려출신의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운암 김성숙 선생 ⓒ 민성진 정확한 분석인 것 같다. 군사쿠데타의 광풍으로 혁신계가 산산조각이 나고, 흩어진 뗏목을 모아 조각배라도 조립할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었다. 그래서 택한 길이 보수정당에 기탁하면서 시간을 벌고 보수야당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의도였다. 김성숙은 이제까지 극단보다는 통합과 연대를 중시하고 이를 실천해 왔다. 주석 4> 앞의 책, 79쪽. 5> 김재명, 「김성숙 - 민족해방과 통일 위해 바친 자의 묘비명」, 『운암 김성숙의 생애와 사상』, 242쪽. |
File #1 | 오마이뉴스1(38).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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