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보센터
  • 언론속의 운암

언론속의 운암

게시판 내용
[오마이뉴스] 분단만은 막자, 남북협상에 나섰지만
관리자
조회수 : 25   |   2019-03-11


 38선을 넘어  백범 김구 선생이 연석회의 참석에 앞서 분단선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김동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35회] 재결합을 위한 힘겨운 만남이 '최후의 만찬'으로 끝난 송별연이 되다

동포가 갈라지고 국토가 두 동강이로 쪼개지는 분단기에 이를 막으려는 통일운동이나 남북협상론자가 없고, 반쪽 정권에서 권력이나 잡겠다고 날뛰는 정상배들 뿐이었다면 후세의 필주(筆誅)를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 주도자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분단만은 막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남북협상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북행에는 여러 가지 '뇌관'이 도처에 깔려있었다.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은 매일 그의 정치고문 버치 중위를 보내 이들의 북행을 만류하였다.

당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던 미군정은 이들 협상파들의 북행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남한의 지도자들을 '착각을 가진 사람', '공산주의자', '용공주의자'로 몰아 세웠고, 이승만과 한민당, 친일세력, 월남인 단체들은 결사반대의 뜻을 표명하였다.

이승만은 "협상 찬성은 소련 목적에 추종하는 것" 이라고 반대의 뜻을 넘어 용공시하였고, 이승만의 영향력하에 있던 '독촉'은 "협상담에 속지 말고, 총선거를 추진하자" 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정용옥,『존 하지와 미군통치 3년』)


▲ 백범과 김규식이 북한 김두봉에게 조국의 완전 독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안한 편지. ⓒ 윤종훈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소총회에서 남한 단독선거를 결의하고, 이 궤도로 정국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1948년 봄)에서 단선ㆍ단전을 막고, 남과 북에 포진한 미ㆍ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길은 남북협상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북행을 반대하는 세력은 미군정 뿐만이 아니었다.
총선에 참여하려는 다수의 정치인들과 이들에게 조종되는 청년ㆍ사회단체들이 앞장섰다. 사회적 분위기도 저해 요인이 되었다.
단선ㆍ단정을 반대하면서 4월 3일을 기해 제주에서 민중항쟁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군ㆍ경과 서북청년단원 500여 명에 군복을 입혀 현지에 보내 진압케하는 등 국내 정정이 지극히 소연한 상황이었다.
김구는 4월 19일 새벽부터 경교장을 포위한 협상반대 세력의 방해를 무릅쓰고 방북길에 오르고, 홍명회도 같은 날 서울을 떠났으며, 4월 20일까지 여운홍 등 10여 명도 방북길에 올랐다. 김규식은 신병으로 며칠 지체하다가 4월 22일 아침 민족자주연맹의 대표 원세훈ㆍ김붕준ㆍ최동오ㆍ신숙ㆍ김성숙ㆍ박건웅ㆍ신기언ㆍ강순ㆍ송남헌 등 16명으로 구성된 대표단과 함께 평양으로 떠났다.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남북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본회의가 열릴 때 단상에는 태극기가 게양되고, "동해물과"로 시작되는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때까지 북한에서도 태극기와 애국가를 국기와 국가로 인정하였다.

연석회의는 세 분야로 나뉘어 열렸다.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대표자 연석회의), '남북조선 제정당 지도자협의회'(지도자협의회), 김구ㆍ김규식ㆍ김일성ㆍ김두봉의 4자회담(4자회담)이었다.

남북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545명이 참석한 대표자연석회의가 27일까지 열린데 이어 27일 저녁부터 30일까지 15인으로 구성된 남북 요인회담이 열렸다. 

대표자연석회의는 회의를 마친 4월 26일 '사회주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과 북미합중국에 보내는 남북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 요청서'를 채택했다. 

홍명희와 엄항섭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이 문건은 연석회의에서 채택되고, 미ㆍ소 양국에 전달할 것을 결의하였다. 하루 전인 4월 25일에는 평양시내 김일성광장에서 북한주민 34만여 명이 모여 연석회의 축하 시민대회를 열렸다. 대표자연석회의는 4월 23일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를 통과시켜 남북에서 단독선거 실시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다.

연석회의가 끝난 후인 4월 24일 오후 6시 김두봉은 자택으로 김구ㆍ김규식ㆍ조소앙ㆍ조완구ㆍ홍명희 등을 초청하여 김일성과 합석한 자리에서 연석회의 결정서의 내용을 포함한 정치문제를 토의했으며, 오후 7시부터는 김구ㆍ김규식ㆍ김일성ㆍ김두봉 4인이 토의를 계속했다. 이 자리에서는 통일에 대한 남북 지도자의 공동성명, 통일을 위한 공동대책기관의 설립, 그리고 통일운동을 위한 조직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 남북협상 기간 평양 을밀대에서 김규식(왼쪽 두번째)과 김구(오른쪽 두번째). ⓒ 위키피디아


4월 24일 김두봉의 집에서 열린 4김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연백수리조합 개방문제와 송전문제 그리고 조만식을 서울에 동행시켜 줄 것, 중국 여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힌 것으로 알려진 안중근 의사의 유해 봉환 등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물과 전기문제는 미군정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발생한 것이라며, 조만식의 서울 동행은 별도의 문제가 있다" 라고 설명했다. 김일성은 조만식과 관련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4김회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이 제안한 북한의 대남 송전계속, 연백 수리조합 개방문제는 성사되었으나, 안중근 의사 유해봉환은 여순이 소련군 관할 지역이라는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번째 4김회담은 4월 26일 대동강 한가운데 있는 뚝섬에서 열렸으나 회담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5월 1일은 메이데이로 북한 당국은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남측 인사들도 기념식에 초대받아 참석하였다. 

김규식과 김구 일행은 5월 4일 평양을 떠나 5일 서울로 귀환하고 김원봉ㆍ홍명희 등은 귀환을 포기하고 평양에 체류하였다. 귀환한 두 김씨는 5월 6일 방북 성과를 공동성명으로 발표했다.


▲ 김규식과 김구. 서울시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김구ㆍ김규식의 남북협상에 관한 공동성명

금반 우리의 북행은 우리 민족의 단결을 의심하는 세계 인사에게는 물론이요.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는 다수 동포들에게까지 금반 행동으로써 많은 기대를 이루어 준 것이다. 그리고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는 우리 민족도 세계의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서 단결할수 있다는 것을 또 한번 행동으로서 증명한 것이다.

이 회의는 자주적ㆍ민주적 통일 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서 양조선의 단선ㆍ단정을 반대하며 미ㆍ소 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을 절대로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연석회의에서 국제협조와 기타 수개 문제에 대하여 우리의 종래 주장이 다 관철되지 못한 것은 우리로서는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국제문제에 대하여서는 앞으로 어느 나라가 우리의 독립을 더 잘 도와주느냐는 실제 행동에서 용이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며 또 기타 문제에 있어서도 앞으로 각자가 노력하여 남북 지도자들이 자주 접촉하는 데서 원활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행동으로서만 우리 민족이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 뿐만 아니라 사실로도 우리 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증명하였다. 앞으로 북조선 당국자는 단전도 하지 아니하며 저수지도 원활히 개방할 것을 괘락하였다. 그리고 조만식 선생과 동반하여 남행하겠다는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북조선 당국자는 금차에 실행할 수 없으나 미구에 그리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김규식과 김구는 연석회의의 공식적인 문서인 외군철수 요청서를 미군정청에 전달책임자로 여운형의 동생 여운흥에게 맡겼다. 여운흥이 하지 사령관을 만나 이 요청서를 전달하자, 하지 사령관은 이를 보지도 않고 '갓템'하고 내팽개쳐버렸다고 한다.

연석회의에서 외국군철수 요청서가 통과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읽어 볼 필요도 없다는 뜻에서 그런 식의 행동을 취했던 것이다. 소련군사령부에 문서 전달은 북측에서 맡았다.

북한주둔 소련군 사령관은 연석회의 요청서에 대한 회답을 소련정부의 이름으로 김두봉에게 전달했다.

"편지에서 그는 외군을 동시에 철퇴하여 외국의 간섭없이 자유롭게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이같은 심정을 이해하며 동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련 정부는 미국 군대와 동시에 철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가 여전히 되어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남북협상은 결과론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의 영구분단을 눈앞에 두고 분단세력에게 국가의 운명을 내맡겨 둘 수는 없다고 하여 추진되었다.

김구가 북행을 앞두고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문제" 라고 피력했던 심경 그대로였다.

남한에서는 미국이 분단정권 수립을 대한정책으로 확정하였고, 북한에서도 소련이 지목한 김일성체제가 굳혀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남북협상은 타의에 의해 갈라졌던 부부가 재결합을 위한 힘겨운 만남이었으나, 하지만 '최후의 만찬'으로 끝난 송별연이 되고 말았다.

 

 





file0 File #1   |   1(15).jpg
게시판 이전/다음글
이전글 [연합뉴스] "윤봉길 의거 김구 지시 아냐..'도시락' 아닌 '물통' 폭탄"
다음글 [파이낸셜 뉴스] 하남역사박물관 상반기 키워드, 독립운동-유가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