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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일보] 좌파에 문호 개방... 좌우 아우른 통일 의정원 출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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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조회수 : 2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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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5
통일의회를 구성한 제34회 임시의정원 의원 일동(1942.10) <40>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일의회 성립
선거규정 개정 좌파 인사 참여 길 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를 받아들여 군사통일을 이룩한 뒤 곧바로 통일의회 구성에 나섰다.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은 으레 통일의회로부터 시작됐다. 수립 초기 각지의 임시정부를 통일하여 통합 임시정부를 발족하기 위해 추진한 것도 통일의회 구성 운동이었다. 임시정부는 좌파 독립운동세력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1942년 8월 ‘임시의정원 선거규정’을 개정하여 좌파 인사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한국독립당도 전당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임시의정원의 문호 개방에 찬성하고, 임시정부 주관 아래 각 선거구의 형편에 따라 보궐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보궐선거는 1942년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11개 선거구 가운데 9개 선거구에서 실시되어 새로 23명의 의원이 선출됐다. 그리하여 의원 수는 기존 의원 23명과 보선 의원 23명을 포함해 46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의 정당별 분포를 보면, 한국독립당은 김구·이시영·조소앙을 포함하여 26명, 조선민족혁명당은 김원봉·김상덕·문일민을 포함하여 16명, 조선민족해방동맹은 박건웅·김성숙 등 2명, 조선혁명자연맹은 유자명·유림 등 2명이었다. 이렇게 좌파 인사들이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임시의정원은 통일의회를 구성하게 됐다. 첫 통일의회는 좌우파 정당의 의원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1942년 10월 25일 중경의 오사야항 제1호 임시정부청사에서 열렸다. 제34회 임시의정원 정기의회 개원식이자 통일의회 출범식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이날 축사에서, “우리 운동은 3·1운동 이래 많은 분열 상태로 오늘 이곳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르짖고 있는 통일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성으로 임무를 다한 데에서 해결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좌우 독립운동세력의 단결을 강조했다. 임시의정원 의원을 대표하여 조소앙도, “과거 무수한 방법의 대립이 이 의회로서 완전히 합일되었다. 과거 무수한 단체의 대립이 한국임시의정원으로 완전 통일되었다. 과거의 각 당파의 대립이 의정원으로부터 완전 통일되었다”고 주장했다. 곧 통일의회의 성립은 독립운동 방략은 물론 단체와 정파의 통일임을 강조한 것이다. 임시의정원을 매개로 하는 좌우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의회 구성은 의회정치사에도 큰 획을 긋는 일이었다. 우선 임시의정원의 정당 분포가 다당제로 바뀌었다. 그동안 한국독립당 일당으로 구성되어 왔지만, 이제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해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혁명자연맹으로 다양화된 것이다. 김상덕 임시의정원 의원당선증(1941.10.13) 이와 함께 의회에 여당과 야당이 생겨나게 됐다. 임시정부와 표리관계를 이루며 여당 역할을 하던 한국독립당만이 아니라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3개 야당이 견제와 타협으로 민주적 정당정치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의장단 선거는 10월 26일 진행됐다. 홍진이 압도적인 지지로 통일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홍진은 과거 국무령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을 앞장서 추진하고 민족혁명당에도 참여한 적이 있었다. 좌우 진영을 아우르는 인물이었던 홍진은 이후 광복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의장으로 활동했다.
<김용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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