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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일보]남양주 6개면 3·1운동 참여… 신분·종교 장벽 없었던 만세운동
관리자
조회수 : 2591   |   2018-12-04


일제 강점기 남양주 지역 6개면 면민 모두가 3·1운동에 참여하였다
​                                                 강진갑 기사입력 2018.11.26 20:14  최종수정 2018.11.26 20:14
1919년 3월 남양주 지역에서는 미금면, 와부면, 별내면, 화도면, 진접면, 진건면 등 6개면 모든 면에서 1개 면도 빠짐없이 3·1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남양주 3·1운동은 1919년 3월 13일과 14일에 미금면 평내리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된 이후 3월 31일 진접면 부평리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10회에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남양주 만세운동의 시작은 미금면 평내리 구장인 이승익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이승익은 3월 1일과 5일의 만세운동 소식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
45세 중년의 농민이었던 이승익은 동리 주민의 여론과 민심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일본 총독 하세가와가 만세운동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말단 기관장들에게 배부한
소위 고유문을 동리 주민에게 읽어준다는 구실을 만들어 주민을 소집하고, 이를 만세 시위와 연결했다.

총독의 고유문은 “국민들은 쓸데없는 유언비어에 열중하여 되지도 않는 일에 광분하지 말라. 제국은 전승국이므로 일한 합병에 관하여 조금도 변경의 여지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100여 명의 주민은 총독의 고유문 내용에 야유를 보내며 곧바로 만세시위에 돌입하였다. 이승익의 기지가 남양주 만세운동의 테이프를 끊은 것이다.

다음 날인 3월 14일 다시 모인 평내리 주민 150여 명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평내리에서 면사무소가 있는 금곡리롤 향해 평화적인 시위행진을 하였다. 금곡리로 가는 두 번째 고개를
200m 내려갔을 때 일본 헌병의 저지를 받았다. 그러나 만세 시위대는 “2천만 동포가 조선의 독립을 기뻐해 만세를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며 행진을 계속하였으나, 일본 헌병이
이승익을 비롯하여 우보현, 이석준, 김영하, 정기섭, 이보영 등 6명의 시위 주도 인사들을 현장에서 체포함에 따라 평화적인 시위로 진행된 미금면 평내리 만세운동은 끝을 맺고 말았다.

평화적인 시위가 일본 헌병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체포되자 이후 남양주의 만세운동은 이전과 다르게 시위대원들이 자위력을 갖추고 시위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일본 헌병의 탄압에 자위력을 갖추고 단호히 맞선 시위대

평내리 시위가 일본 헌병의 탄압으로 좌절된 3월 14일 와부면 송촌리에서는 이정성, 이춘경, 김정하 등에 의해 새로운 만세운동 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 이들은 3월 15일 이른 아침
송촌리 주민 10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면 소재인 덕소리로 행진하였다.

시위 행렬이 진중리와 조안리를 거치는 동안 부근의 주민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고, 덕소리에 도달할 때 시위대는 5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덕소리에 진출한 시위대는 일본 헌병과 충돌하게 되었고, 이때 시위 주도 인사 3명이 헌병대에 연행되었다. 이에 분개한 시위 군중들은 몽둥이를 들고 총칼로 무장한 헌병대에 맞서면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시위대의 저항에 놀란 일본 헌병들은 공포탄을 쏘아대며 시위 대원 40여 명을 체포하였다.

시위대는 비록 해산되고 말았지만, 시위 과정에서 일본 헌병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몽둥이 등으로 무장하고 일본 헌병에게 저항하였다는 면에서 이전 평내리 시위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본 헌병은 체포된 40명 중 17명을 기소하였는데, 이 중 9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야간에 시위를 펼치다

남양주 3·1운동은 3월 16일 1천여 명이 참가하여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화도면 마석우리 만세운동으로 정점을 이룬다. 3월 16일 이달용, 이재하·이택하·이승보 등이
만세운동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이것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이재하·이택하·이승보 3인이 피검되었다.

이날 밤 10시에 답내리, 월산리 주민 200여 명이 시위 주동인물 3인의 체포에 항의하는 시위를 펼쳤다. 한 시간 뒤인 11시경에 이르자 어둠이 보장해주는 익명성 탓인지 시위대는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마석우리 헌병대 병참으로 달려가 피검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급격히 커지고 분위기도 점차 격앙되자 다급한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를 이끌었던 이달용, 손복산, 신영희, 유상규, 이교직 등 5명이 순국하였고, 이재혁, 윤균, 강덕여, 윤정식, 원대현 등 7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 헌병은 다음날 새벽 시위에 가담한 김필규, 강선원, 윤성준, 남궁우룡, 김원석 등 인사 5명을 체포하여 고문을 가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고 재판에 회부하여
실형을 선고하였다. 마석우리 시위는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펼쳐진 시위였다.

마석우리 만세운동 과정에서 남양주 지역에서 첫 번째 희생자가 발생하자. 주민들의 만세 시위는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3월 24일 청년 13명이 진접면 금곡리에서 기습 시위를 펼친 것이다. 시위대원이 일본 헌병에 피체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시위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3월 29일에는 남양주 지역 3개 면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진접면 금곡리에서 40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시위를 하였다.
출동한 일본 헌병에 의해 1명이 피살되고 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명이 체포되었다. 또 별내면 퇴계원리에서도 200여 명의 주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진압에 나선 일본 헌병대에 5명의 주동 인사들이 피체되었다. 진건면 오남리에서 나상규, 손성남 등이 주도한 만세 시위가 수십 명의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펼쳐졌다.


봉선사 승려가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3월 31일 남양주 지역 마지막 만세운동이 600여 명의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진접면 부평리에서 펼쳐졌다. 부평리 시위의 특징은 봉선사 승려 이순재, 김성암, 김석로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김성암의 법명은 성숙이다. 김성숙은 독립운동사에 뚜렷이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3·1운동에 참여하여 2년간 옥고를 치렀고,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의열단에 참여하였으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인물이다.

봉선사 승려 이순재와 김성암은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을 듣고 봉선사 인근 부평리 주민을 모아 만세시위 벌일 계획을 세웠다.
먼저 문건을 제작하고, 배포하기로 하였다. 문건은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의 독립이 결정되었다.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운동하면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정세분석을 하면서 각 지역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거행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3월 29일 김성숙 등은 봉선사 서기실에서 200매 정도의 유인물을 인쇄하여
그날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부평리 등 인근 4개 동리에 배포하였다.

부평리에 거주하는 이재일은 ‘거주하는 동리의 주민 일동이 그 동리 광릉천 강가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을 전달받았다.
이 격문은 봉선사 승려들이 작성한 격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재일은 즉시 동리 사람들과 격문을 돌려 읽고 3월 31일 광릉천 강가에서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31일 이재일. 김순만 등이 중심이 되어 동리 사람 600여 명이 광릉천 자갈 바닥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출동한 일본 헌병이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고, 시위를 주도한 인사 8명을 체포, 기소하였다.

남양주 지역 만세운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양주 지역 6개면 모든 면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둘째 일제 강점기 남양주는 농촌 지역이었기에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대부분 농민이었다.
셋째, 남양주 만세운동은 초기 미금면 평내리 시위에서는 평화적인 시위를 하였으나 일본 헌병의 탄압에 맞서 무장을 하고 단호하게 일본 헌병에 맞서 시위를 펼치고 일본헌변대를 공격하였다.
넷째, 소수 청년의 기습 시위 등 시위 전략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다섯째, 남양주 만세운동은 기독교도와 불교 승려가 큰 역할을 하였다.



남양주 시민의 3·1운동에 대한 기억

남양주 지역은 일제 강점기에 6개 면 중 1면도 빠짐없이 3·1운동이 펼쳐진 독립운동의 고장이다. 그래서인지 남양주시에는 3·1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시위 과정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추념하는 조형물이 다른 기초 자치단체보다 다수 세워져 있다.

남양주 3·1운동의 정점을 찍은 1919년 3월 16일 화도면 마석우리 3·1운동을 기념하고 시위 과정에서 순국한 애국지사를 추념하는 조형물이 가장 많은 3개가 세워져 있다.
가장 먼저 건립된 것은 1965년 화도읍 사무소 내에 세워져 있는 ‘화도읍 순국선열기념비’이다. 이어 1993년에 월산교회가 마석우리 3·1운동이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었음을 기념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를 추념하기 위해 교회 마당에 ‘화도읍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1998년에는 남양주시가 화도읍 월산리에 ‘남양주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3월 14일과 15일에 조안면 일대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로는 1994년 조안면 송촌 1리에 세워져 있는 ‘남양주 3·1의거 애국선열 추념탑’과 ‘용진 3·1의거 기념비’가 있다.
3월 31일 진접읍에서의 만세시위를 기념하는 조형물로는 1999년 남양주시가 건립한 ‘남양주 장현 3·1운동 기념비’가 있다.
남양주시에 3·1운동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다른 자치단체보다 많이 건립된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강진갑 경기학회장, 한국전통문화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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