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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뜨거운 민족愛 가슴으로 통하다
관리자
조회수 : 2276   |   2006-08-16
뜨거운 민족愛 가슴으로 통하다

독립운동가 후손들 中항일유적지 탐방 대학생과 한자리

님 웨일스의 ‘아리랑’으로 널리 알려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산(본명 장지락ㆍ1905~1938), 그리고 승려 출신 독립운동가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ㆍ1898~1969) 선생의 후손들을 중국에서 만났다. 그들의 성은 두(杜)씨와 고(高)씨였고, 우리 말은 한마디도 못했지만 민족 의식만은 형형히 살아 있었다.

광복절을 이틀 앞둔 13일 중국 땅에 살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후손 10명이 베이징(北京)의 한 호텔에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이사장 이수성) 주최로 7일 상하이(上海)에서 시작해 8박9일간 난징(南京) 우한(武漢) 광저우(廣州) 충칭(重慶) 등 중국 대륙을 돌며 선조들의 항일 투쟁의 길을 좇은 ‘운암 김성숙 항일운동 사적지 중국탐방단’학생 50여명을 만나기 위해서 였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성숙 선생의 둘째, 셋째 아들인 두건(杜健ㆍ71) 두련(杜連ㆍ61)씨는 우선 “일제 당시 중국에 건너와 목숨을 건 항일 투쟁을 한 수 많은 청년들이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갔다”며 “여러분들이 더욱 노력해서 그들의 항일 독립정신이 오래도록 우리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당부했다. 운암이 중국의 여성혁명가 두쥔후이(杜君慧ㆍ1904~81)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들 형제는 한국전쟁 발발로 아버지를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됐다. 성도 어머니의 성으로 바뀌었다 한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씨는 “선친의 친구분이 나를 대신 키우면서 성이 바뀌었다”고 성이 바뀐 사연을 얘기하면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그 당시가 얼마나 절박했었는지…”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두씨 형제는 각각 중국 중앙미술학원 유화학부 부학장과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정보센터 부주임을, 고씨는 중국 국가경제무역위원회의 과학기술국 부국장를 역임한 중국의 지도층이지만 항일 운동에 산화한 민족의 선열들을 기리는 마음은 절절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학생들과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 준 고국의 젊은이들이 더 없이 고맙다”고 감격해 하고, 태권도 시범에는 손뼉을 치며 흥겨워 했다. “초면이지만 구면인 것 같습니다. 몸 속에서 한민족의 같은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정부에 대해 당부하고픈 말도 많았다. 두건씨는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 속에 어렵게 살다 세상을 뜬 운암의 쓸쓸한 말년을 얘기하며 “아버지의 고난은 중국에서 독립 운동할 때라기보다 귀국한 45년부터 시작된 것 같다”고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철저한 청산을 부탁했고, 고영광씨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과거 잦은 도피 등으로 증거 문서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만큼 정부가 유공자 인정에 융통성을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의열단으로 활동한 유자명(본명 유흥식ㆍ1891~1985) 선생의 딸 유덕로(59ㆍ베이징과기대 교수)씨는 우리 정부가 중국에 독립운동연구 기관을 설립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그는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 무대였던 중국에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기관 하나 없는 게 현실”이라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같은 독립운동가 후손들까지 우리 말을 잊고 중국인이 돼가는 만큼 시간이 촉박하다”고 안타까워했다.

무명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중국작가협회 중앙위원 김철(73)씨는 꿈에 그리던 조국 광복을 이룬 뒤 오히려 이념 다툼의 희생양이 돼 역사 속에 묻혀야 했던 선혈들의 이야기, 여전히 계속되는 남북간 이념의 장벽을 거론하면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은 하나같이 조국 독립의 염원을 안고 목숨을 던졌다”며 “그들이 품었던 이념과 사상을 오늘날의 잣대로 재단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오늘 할아버지가 일제에 맞서다 순국한 친구에게 함께 한국의 대학생들을 만나러 가자 했지만 ‘김일성대를 나온 나를 반길 리 없다’고 거절하더라”며 “그 친구나 우리나 그 누구가 김일성이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일으킬지 미리 알았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마지막으로 “한국에 돌아가서도 맡은 바 책임에 충실해 나라의 부흥과 남북통일에 많은 일을 하길 바란다”고 대학생들의 손을 꼭 잡았다.


베이징=정민승 기자 msj@hk.co.kr
2006.8.14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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