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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지고지순한 운암 민족주의 정신 계승”
관리자
조회수 : 2768   |   2006-08-16
“지고지순한 운암 민족주의 정신 계승”
태허 스님 항일유적지 탐방단 동행취재

대학생 50명 中 답사…통일 견인 다짐

<사진설명>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한 거점이었던 중국 무한시 승리가 15호. 운암 태허 스님은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을 주도하고 이곳에서 기관지를 발생하며 편집을 책임졌다. 그러나 지금은 건물만 남아 있고, 모두 상가가 자리잡고 있다.

스님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태허 스님의 항일유적지 탐방에 나선 ‘제1기 운암 김성숙(태허 스님) 항일운동 사적지 중국 탐방단’은 지난 8월 7일∼8월 15일까지 중국 상하이를 비롯해 난징, 무한, 광저우 등 태허 스님의 민족주의 정신이 깃든 항일유적지를 탐방하며 스님의 민족주의 정신을 계승하고 남북통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광복 61주년을 맞아 불교계 안팎에서 생애와 사상에 대한 새로운 조명 작업이 진행 중인 민족주의자 태허 스님의 항일운동 유적지 탐방에 나선 50명의 대학생들은 8월 6일 출정식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무수한 옥고를 치르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향한 열정만큼은 꺾이지 않았던 태허 스님의 뜻을 이어 만화장창 피어난 우리 민족의 미래를 떠받치는 강철기둥이 될 것”을 다짐했다.

8박9일 일정… 항일 유적지 탐방

탐방단은 8월 7일 중국 상하이에 첫 발을 딛고 1932년 10월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혁명당·의열단·한국광복군동지회 등 5개 단체 대표가 모여 통일전선체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을 협의했던 근검여사 터(당시 동방여사)와 26년∼32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사용했던 마지막 임정청사를 둘러보며 태허 스님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의 발자취들 살피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탐방단은 상하이에서 쑤저우(소주)를 거쳐 대장정에 오른지 3일 만에 난징에 도착, 유명한 한글학자였던 김두봉 선생과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한 김규식 박사가 교수로 재직한 의열단의 간부양성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생들의 훈련장소였던 천녕사와 의열단 단장 김원봉 계열의 학생들이 생활한 호가화원 등 의열단의 주요 거점들을 둘러봤다. 당시 태허 스님은 무력투쟁 단체로 이름을 드높였던 의열단의 행동강령을 만들고 정치노선을 이끌며 의열단의 변화를 주도하는 등 사실상 의열단의 두뇌로 활동했었다.

난징(남경)에서 의열단 활동의 변화를 주도했던 태허 스님의 발자취를 돌아본 탐방단은 열차를 타고 13시간을 이동, 스님이 직접 조직한 조선민족전선연맹 자리와 편집을 맡아 조선민족전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을 정도로 독립에 대한 열정이 깊이 배어 있는 무한에 도착했다.

양쯔강 중류에 자리잡은 무한은 장개석이 난징을 근거지로 삼고 무창의 국민정부에 대항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이 막을 내리자 주은래의 주도로 좌파세력이 봉기를 일으키는 등 중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곳.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1927년에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에 다니거나 김원봉처럼 무창봉기에 참가하면서 족적을 남기기도 했었다. 특히 태허 스님은 고도의 선전전술을 구사하며 무장단체의 정치노선을 이끌기도 했다.

유적지 훼손됐지만 정신은 면면히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거점이기도 했던 무한은 태허 스님의 열정이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이다. 태허 스님이 활동했던 무한의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는 현재 무창실험소학교가 들어서 있어, 옛 자취를 찾아보기가 불가능해 탐방단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숙명여대 경영학부 운선아 씨는 “현재의 대한민국 건설에 토대를 마련한 독립 운동가들의 항일유적지가 하나 둘 사라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며 “국가적 차원에서 태허 스님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사상을 정확하게 조명하고 그 뜻을 기릴 수 있어야 민족의 자긍심도 높아질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탐방단은 이어 광저우(광주)를 방문해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 그리고 임시정부 판공처 등 태허 스님이 활동했던 유적지를 탐방했다. 광저우는 태허 스님을 비롯해 이육사와 김산 등 한국 현대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혁명가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며, 태허 스님은 이곳 중산대학(당시 광동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며 정신적으로 독립운동의 사상을 재무장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태허 스님은 이 대학에서 두군혜 여사를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됐고, 광동코뮨 이후에 결혼, 세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후손은 현재 중국에서 저명한 예술가, 정치가, 학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의 태허 스님 기념사업회와 공동으로 활동할 중국 기념사업회 설립을 추진 중이다.

태허 스님의 항일운동 유적지를 따라 이동하던 탐방단은 대장정 6일째에 이르러 스님이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해방을 맞은 충칭시(중경)에 도착했다. 태허 스님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 중국 공산당에 합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조선의용대 선봉장 김원봉에게 임정에 합류할 것을 설득,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곳이 바로 충칭이다. 하지만 이곳의 항일유적지는 중국의 개발정책에 따라 고속도로가 개설되는 등 많은 변화를 거치면서 자취를 감췄다.

양병기 단장(청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은 “태허 스님의 항일운동 유적지가 상당부분 훼손되고 자취가 사라지긴 했으나, 그분의 사상이 온전히 살아 있었던 만큼 그 사상을 받들어 전하는데 다함께 노력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제1기 운암 김성숙 항일운동 사적지 탐방의 의미를 밝혔다.

“독립 정신 선양에 앞장” 다짐

탐방단은 8월 14일 베이징에서 베이징대학 국제관계학원(정치외교학과) 학생들과 ‘동북아의 두 과제, 평화와 환경-한중청년의 역할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토론회를 갖고, 61주년 광복절인 15일 귀국했다. 탐방단 학생대표 류지훈(충남대 법학과) 씨는 “태허 스님의 절박했던 항일운동을 확인하고, 민족주의 사상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된 만큼 향후 1기 탐방단을 중심으로 청년단을 구성해 태허 스님의 꺾이지 않았던 민족주의 정신을 선양하는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상하이=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태허 스님은

스님 출신 임정 국무위원 활동
민족 대단결-독립 최우선 강조

태허 스님(운암 김성숙·1898∼1969)은 스님 출신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내며 민족주의를 강조했던 사상가이기도 하다.

스님은 “민족의 문제가 더 크다. 민족이 독립된 뒤에야 공산주의고 사회주의고 무엇이든지 되지 민족의 독립이 없이 무엇이 되느냐. 우리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전 민족이 단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족주의다.”라며 민족 중심의 사고를 지닐 것을 강조했다.

스님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대한독립학교를 다니며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다짐하고, 1916년 신흥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봉천으로 가던 중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 스님을 만나 경기도 용문사로 출가했다. 용문사에서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태허(법호·법명은 성숙)라는 법호를 받은 스님은 1918년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로 옮겨 수행하던 중 만해 스님 등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을 맺어 봉선사 스님들과 독립문서를 제작해 유포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3·1운동 당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1919년 출옥후 봉선사에 승적을 두고 무산자동맹 노동공제회에서 활동했다.

스님은 이후 1923년 불교유학생으로 중국 북경 민국대학에 입학해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조선의열단에 참여해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독입운동에 발을 디뎠다. 스님은 이후 △24년 창일당 조직, 기관지 『혁명』 발행 △25년 북경에서 추방돼 중산대학에서 정치학 전공 △26년 유학한국혁명청년회 조직, 기관지 『혁명운동』 창간 △27년 광주 황포군관학교 교도단 참여 △28년 상해로 탈출, 저술활동 △31년 중국 반제국주의동맹의 간부로 활동 △36년 중국 각지에 잠복중인 혁명동지 규합해 조선민족해방동맹 결성 △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 창설 △42년 임시정부 내무차장 취임 △4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취임 등의 활동을 펼치다가 45년 12월 환국해 정치인으로 활동을 했으나, 정부와 미군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정부와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아야만 했다.

스님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했으며 말년에 병들어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그토록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이렇게 식사도 변변히 못하고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후손들에게 “내가 무슨 상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국가와 민족이 우선임을 강조했다.

1969년 입적 후에 정부와 여야 정치권이 사회장으로 장례식을 치른 것이 스님의 독립운동에 대한 국가와 사회차원의 처음이자 마지막 예우였다.

2006.8.16 법보신문 8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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