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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독립투사 운암 김성숙 선생 재조명 확산
관리자
조회수 : 3236   |   2006-05-10


ダ㎰坪?지낸 운암(雲巖)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은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는 항일무장투쟁, 해방 후에는 반이승만 정권운동과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을, 5.16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길을 걸으신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지도자였으며 실천적 종교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구국의 횃불인 운암 김성숙을 기억하는 일반인들은 드문 편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 있는 대한독립학교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들의 생애를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우던 운암은 한일합방 이후 독립학교가 문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학교에 가지 않고 조부로부터 직접 한문을 배웠을 정도로 남달리 애국심이 강했다. 어린시절 운암은 대한제국 때 정위(正尉, 지금의 대위)를 지내다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든 삼촌에게 독립군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운암은 독립군에 참가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마침내 1916년(18세) 독립군에 참가하기 위해 집을 떠나 만주로 향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불교에 입문하여 2년 6개월간 기초적인 승가생활을 익힌 후 3년간 불교 경전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끝에 태허(太虛)라는 법명을 받아 스님이 되었다. 운암 김성숙의 승려(태허스님) 생활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 등장하는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충창’은 바로 운암을 지칭한다. 운암은 1919년 민족대표 33인 의암(義菴) 손병희(1861~1922), 불교계 인사인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 범산(梵山) 김법린(1899~1964) 등과의 인연으로 경기도 양주와 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등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운암의 중국 항일투쟁 일지 그 다음해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중국으로 건너가 광주 중산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등 학문적 기틀을 다지는 한편, 소해(宵海) 장건상(1882~1974), 양명(양건 또는 양건일이라고도 불림),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 등과 함께 혁명단체인 창일당(倉一黨)을 조직해 「혁명」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등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22년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조선무산자동맹회(朝鮮無産者同盟會)와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에 가담해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펼쳤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핍박받는 민중(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1923년 단재 신채호, 유우근(일명: 유자명(柳子明)) 등과 함께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에 참여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는 의열단의 활동지침서가 된 역사적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하였으며, 운암은 항일의 깃발아래 조직된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에 참여함으로써 무력을 독립투쟁의 유일한 수단으로 보고 일제의 관리들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하고 공관을 파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그가 이 시점에 의열단에 가입한 이유는 의열단의 기본이념인 일본을 반대하고 모든 권력을 부정하며 강력한 항일무력투쟁을 위한 이념적 무기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의열단은 주로 암살과 파괴에 치중했으나, 의열단 가입 후 운암의 주도하에 정치단체로 탈바꿈하게 된다. 또한 중국 상해에서 중국 전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모아 재중국조선청년총연맹(在中國朝鮮靑年總聯盟)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36년 중국각지에 흩어진 동지들을 규합해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을 조직했다. 이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 조선혁명자동맹(유자명), 조선민족혁명당(김원봉), 조선혁명청년연맹(최창익) 등을 통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군’을 창설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중국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그는 1년 뒤 국무위원으로 귀국했지만, 3년만인 1946년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임정을 떠났다. 해방 후 극심한 좌우갈등과 이념대립의 벽을 넘어 갈라진 조국의 통일을 위해 애썼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미군정에 반대하는 좌익인물이라는 죄목으로 내려진 6개월의 금고형이었다. 박정희 독재정권과의 대립 1961년 5.16 군사혁명 이후인 5월18일 용공분자로 낙인찍힌 그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성동경찰서 유치장으로 들어가 다시 종로경찰서로 이첩되었다.운암 김성숙은 또 다시 10개월간 감옥에서 보내다가 나이 60이 넘고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돼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이 당시 혁신계 인사로는 운암을 포함해 소해 장건상, 춘곡(春谷) 원세훈(1887~1959),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 우천(藕泉) 조완구(1881~1952), 민세(民世) 안재홍(1891~1965), 단주(旦洲) 유림(1894~1961), 우사(尤史) 김규식(1881~1950), 소앙(素昻) 조소앙(1887~1958) 등 9명이다. 이들은 30년 안팎의 긴 세월 동안 풍찬노숙하며 항일투쟁에 몸 바쳤으며, 극좌와 극우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한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이다. 친미적인 이승만 세력과 친일파들의 극우노선을 비판했고 박헌영의 극좌노선도 따르지 않음에 따라, 극우파는 이들을 기회주의적 친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고, 극좌파는 회색적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했다. 독립투사의 비참한 말년 오로지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됐던 운암에게 되돌아 온 것은 어이없게도 가난과 탄압뿐이었다. 이로 인해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대립 속에서 설자리를 잃고 정치적 낭인으로 떠돌다 중태에 이르도록 병원 한번 가보지도 못하고 단칸집에서 1969년 70세의 나이에 외롭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1982년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장을 치뤘다. 민성진 기자 2006/05/10 [10:41]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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