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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조국 헌신 70평생…남은 건 투옥-가난-병
관리자
조회수 : 3312   |   200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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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헌신 70평생…남은 건 투옥-가난-병

 

 

운암 김성숙의 생애와 사상

 

 

19세에 봉선사로 출가…중도사상 확립
만해·손병희 인연…독립·통일운동 투신


스님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운암 태허 스님은 어떤 인물인가.

운암은 민족사랑에 근간을 둔 민족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에 입문해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섰고, 출가 후에는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한 중도관을 확립해 민족적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 복지국가건설 이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을 펼쳐 보였다. 때문에 그의 사상과 이념을 한마디로 축약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평안북도 철산에서 1898년 태어난 운암은 어린 시절부터 예사롭지 않은 성장과정을 거쳤다. 대한독립학교에서 호국의 일념으로 생을 보냈던 위인들의 생애를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우던 그는 독립학교가 문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학교에 가지 않고 조부로부터 직접 한문을 배웠다. 이 때 배운 한문교재가 바로 불교경전이었고, 이는 운암에게 있어서 학문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에 뛰어든 삼촌에게 독립군 이야기를 들으며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결심한 그는 만주 신흥학교로 가기 위해 무작정 집을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위인들의 생애를 통해 형성된 민족애는 조국독립이라는 염원을 품게 했고, 운암의 일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집을 떠나 만주로 향하던 운암은 1916년 우연한 기회에 용문사 풍곡신원 선사를 만나 출가를 결심하고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성숙(星淑) 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운암은 이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고, 봉선사에 머물며 배웠던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의 사상 전반을 결정짓는 획이 되었다.

운암은 이후 태허라는 법명을 받고 봉선사에서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선 후에 손병희·만해·김법린 등과 인연을 맺었으며 그 인연으로 3·1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몇몇 스님들과 함께 경기도 양주·포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만세를 부르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2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운암이 석방될 무렵 조선은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 역시 1922년 무산자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다. 1923년 5명의 스님과 함께 북경으로 건너간 운암은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등 학문적 기틀을 다졌고, 장건상·양명·장지락 등과 함께 창일당(倉一黨)을 조직해 『혁명』이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운암은 상해에서 중국공산당과 연합해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중 1936년 중국 각지에 흩어진 동지들을 규합해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고, 이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이어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가열차게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그는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1946년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임정을 떠났다.

운암은 공산주의보다 민족해방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좌우로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3·1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해방되는 날까지 숨가쁘게 투쟁해왔던 운암은 미군정을 반대한 죄로 6개월의 금고형을 받았고, 좌익인물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운암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그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또다시 10개월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그나마 나이 60이 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돼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운암의 삶은 말 그대로 고단함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말년에 천식으로 고생하던 그는 가난 때문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69년 4월 12일 숨을 거뒀다. 민족을 밝히던 별이 그렇게 사라졌던 것이다. 오로지 핍박받는 민중을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자가 됐던 운암에게 되돌아온 것은 어이없게도 가난과 탄압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길을 걸었다. 자신이 평생 화두로 삼았던 독립, 통일, 민주화를 위한 일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운암은 혁신계인사 또는 중간파로 분류되는 중심 인물이다. 해방 이후 극좌파와 극우파의 대립이 심각해지면서 양극단의 편향성을 경계한 중간파는 설자리를 잃은 채 정치적 낭인으로 떠돌게 되었다. 운암을 비롯한 중간파는 극우파에게 기회주의적 친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았고, 극좌파로부터는 회색적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운암을 중심으로 한 중간파는 극좌와 극우를 극복하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한 민족통일에 힘을 기울였다.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운암의 중도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활동해온 김재명이 『한국현대사의 비극-중간파의 이상과 좌절』에서 운암을 비롯한 중간파를 민족 양심세력으로 규정한 이유 또한 극단적 모습을 탈피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의 양심세력들은 지금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우리의 현실을 비춰볼 때 운암을 비롯한 이들 중간파의 이상주의적 통일 염원을 되새기는 일은 여전히 소중하다며 이들의 삶과 사상에 대한 재조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sjs88@beopbo.com

<2006-03-24/8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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