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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37주기 추모법회 봉행(동영상)
관리자
조회수 : 3109   |   200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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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37주기 추모법회 봉행

 

 

기념사업회 출범…사상 선양 사업 추진

 

 

스님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운암 김성숙 스님의 입적 37주기를 추모하는 법회가 3월 24일 오후 2시 서울 조계사 극락전에서 봉행됐다.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주최로 봉행된 추모재에는 스님의 민족·통일사상 계승 및 선양에 뜻을 같이한 각계 인사와 유족들이 참석해 고인의 뜻을 기렸다.

운암은 민족사랑에 근간을 둔 민족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에 입문해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섰고, 출가 후에는 부처님 가르침에 근거한 중도관을 확립해 민족적 사회주의에서 민주주의 복지국가건설 이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을 펼쳐 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운암은 평안북도 철산에서 1898년 태어났으며, 1916년 만주 신흥학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용문사 풍곡신원 선사를 만나 출가를 결심하고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운암은 봉선사에서 출가 정진하던 중 손병희, 만해, 김법린 등과 인연을 맺어 3·1운동에 가담했다가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석방된 이후 조선 사회에 널리 퍼진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1922년 무산자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했다. 이어 1923년 5명의 스님과 함께 북경으로 건너가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면서 학문적 기틀을 다졌다.

운암은 이후 창일당을 조직해 혁명이라는 잡지를 발행한 것을 비롯해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을 결성해 활동했고 1938년에는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가열차게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운암은 이같은 활동과 공로를 인정받아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했고, 43년 국무위원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46년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며 임정을 떠났다.

공산주의보다는 민족해방을 우선적으로 생각했고, 해방 이후에는 좌우로 갈라진 조국의 통일에 온 힘을 다했던 운암은 미군정을 반대한 죄로 6개월 금고형을 받고 좌익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운암은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히면서 수 차례에 걸쳐 핍박을 받아야 했고, 결국 69년 4월 12일 숨을 거뒀다. 운암은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걸었으며 한 평생 독립과 통일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일에만 전념할 정도로 민족애가 남달랐다.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회장 이수성)는 이러한 스님의 사상을 새롭게 조명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이달 말 사단법인으로 공식 출범하며, 운암 테마파크 조성 등 다양한 사업계획을 세우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경기도 일원 20만평 부지에 운암테마파크를 건립한다. 테마파크에는 운암기념관을 비롯해 일제시대의 거리를 복원한 시대물 전용 세트장, 호국불교관, 봉선수련원, 유스호스텔, 전통 민속체험장, 운암시민공원 등의 시설을 건립할 계획이다.

기념사업회는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시고, 해방 후 여생을 반 독재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으면서도 빈손으로 돌아가신 운암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 널리 알려 후세와 후대의 본으로 남기기 위해 테마파크를 조성하기로 했다”고 운암테마파크 조성 계획을 밝혔다.

기념사업회는 또 독립유공자후손 장학사업, 국내외 독립운동 유적지 발굴, 독립유공자 빈민 지원사업, 특수목적학교 건립 및 운영, 각종 문화행사 개최 및 김성숙상 제정·운영 등의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는 “운암 테마파크가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문화·복지국가를 이룩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정신적인 모체로서 수준 높은 문화국가를 이룩하는 산실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심정섭 기자sjs88@beopbo.com

<2006-03-24/8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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