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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 탄생의 산파역
관리자
조회수 : 3256   |   2006-02-14


국무위원 14명 중의 한 사람인 운암(雲岩) 김성숙 (1898~1969) 선생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닻을 올렸다. "운암 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는 1월23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 사 21층 강당에서 열린 발기인대회와 창립총회에서 이수성 전 국무총 리를 이사장으로 추대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승려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운암은 3·1운동(1919) 때 일본 경찰에 체 포돼 2년 옥고를 치른 직후 만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뛰어든 인물. 독립운동 초기에는 사회주의 운동단체에 가담해 무장투쟁을 주도하다 가 광복 후에는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해 ‘좌우합작 운동’을 펼쳤다. 신탁통치와 관련해서는 ‘찬탁’ 입장에 서서 반 (反)이승만 정권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런 전력 탓에 운암은 이승만 정권에 이어 박정희 군사정권으로부터 도 극심한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5·16군사정변(1961) 직후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혁신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운암은 결국 군사정권의 치밀한 ‘반 공’ 이데올로기 정책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지금까지 운암이 역사 학계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운암 기념사업회가 출범하기까지 산파 구실을 한 사람은 민성진 사무 국장이다. 민 국장은 운암이 첫 번째 부인 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큰 딸의 아들로, 운암의 장손자다. 민 국장은 “‘한국현대사의 비극’이라는 책에서 할아버지에 대한 글 을 읽고 유족으로서 부끄러웠고,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보수 우익세 력에 의해 잘못 기술된 역사 교과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 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중국에 있는 삼촌들과 상의 해서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기념사업회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민 국장은 운암이 상해임시정부 요인 중 유일한 승려 출신임에도 불교 계에서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운암은 경기 도 남양주 봉선사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 선생과 만해 스님을 만나 3·1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그 길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민 국장은 “2월 중 이사회를 열어 독자적인 자금 마련과 사업계획을 세워 국가보훈처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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