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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김성숙,불교계 대표 항일투쟁가
관리자
조회수 : 3302   |   2006-02-11


단-임시정부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운암(雲岩) 김성숙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항일운동에 적극적으 로 가담했던 불교계 대표적 항일 투쟁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한용 운, 김법린 등과 함께 3·1만세 운동에 참가했는가하면 이후 조선의 열단, 재중조선 총동맹, 조선의용대, 임시정부 등의 항일단체에 참가 해 주요 요직을 맡으면서 일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헌신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성숙은 어릴 때 부터 가난과 함께 일본 식민통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암울한 시 대상황과도 싸움을 해야만 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16 년 김성숙은 집안의 삼촌이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 식을 접하고 독립군에 참가할 목적으로 집에서 땅을 판 돈을 훔쳐 만 18세의 나이에 집을 나섰다. 그러나 어린 김성숙에게는 만주라는 여정이 너무나 멀었다. 결국 만 주로 가는 중도에 어린 청년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심한 한 어른에게 붙잡혀 다시 집으로 돌아올 형편에 놓였다. 그러던 김성 숙은 마침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새벽에 절을 나섰다가 한 스님 을 만나 돌연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를 했다. 용문사에서 2년의 행자생활을 마친 김성숙은 이후 사미계를 받고 다 시 봉선사 강원에서 본격적으로 경학을 익혔다. 어릴 때부터 틈틈이 서당을 다니면서 한문을 익혀온 김성숙은 이런 까닭에 경전을 익히는 데 언제나 남들보다 앞섰다. 그러던 그는 당시 손병희, 한용운, 김법린 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 던 을초 스님을 시봉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함께 독립 운동에 대 한 의지를 다시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후 3·1운동에 참가했던 김성 숙은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2여년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 김성숙은 이후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중산(中山)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의열 단, 재중조선총동맹, 중국 반제국주의 동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 민족전선연맹, 임시정부 등의 주요항일단체에 가입, 주요 요직을 맡 으면서 다양한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황야(荒野)」, 「혁명」등의 계몽 잡지를 발간해 민족계 몽을 위한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김성숙은 미 군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 을 보이면서 좌익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그러면 서도 좌·우익 합작운동을 전개해 민족의 분열을 경계했다. 이후 자 유당과 군사 정권의 잇단 독재에 맞서 싸움을 계속하다 또다시 옥고 를 겪기도 했던 김성숙은 1969년 4월 12일 지병인 기관지염으로 결 국 입적했다.<2005-03-16/795호>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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