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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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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LIFE)독립, 통일, 민주화를 부르짖던 열혈승려...
관리자
조회수 : 3806   |   2006-01-31


승려 조선인 혁명가 "운암 김성 숙" -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를 통한「혁명가 항일회상」- 코리아 라이프 webmaster@ikoreanews.com 2005년을 마감하는 정치권은 여전히 민생의 문제를 위한 고민보다는 각자의 이권을 쫓아 편 가르기, 또는, 타자성을 악용한 은밀한 접전 과 계략들로 채워져 변화무쌍해만 보였다. 최근 대두된 ‘혁신우파’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의 예만 보아 도 근본취지와 목적이 달라붙는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가, 정 부와 여당의 오해, 또는 야당의 사기극에 휘말려 근본의 푯대와 의미 를 실추해가는 듯 하다. 이념과 사상으로 나뉘어 남과 북이 된 이 나라의 긴 세월동안, 민족 의 화해와 통일이라는 명분아래 치러지는 잔혹극과 민중, 민주, 인권 과 교묘하게 얽혀 내놓인 결부책들이 꼭 어제의 일만은 아니다. 지난 해 ‘일본 교과서 왜곡’으로 ‘역사알리기 캠페인’에 온 국민 의 관심과 열기가 채 식지 않을 무렵, 봉선사 내원암에 대한 이해창 후손들의 ‘땅찾기 소송’을 계기로, 순국한 항일 운동 애국지사들 이 무덤에서 일어났다. 10월 6일 6시 30분경,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 친일잔재 청산과 관련된 법안의 조속한 재정을 촉구하는 ‘친일 청산과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촛불집회’가 열렸다. 친일파 이해창 후손들의 소송대상이 되었던 봉선사 주지 철안스님은 이날 “반민족 친일행위자재산환수특별법에 대해 ”사법부는 기존의 보수적 판결을 버리고 조계종이 제출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받아들 여 민족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며 ”재산환수특별법도 조속히 재 정해 지난 60년간 역사바로세우기를 방관해 온 우리 잘못을 바로잡아 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날 촛불집회에는 친일파재산환수특별법을 공동발의한 최용규 열린우리당 의원과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 조계 종대표들과 김상웅 독립기념관장, 운암 김성숙기념사업회, 홍근수, 한상렬 목사등 각계인사들과 신도들을 포함해 약 300여명이 모이게 되었다. 12월 8일에 ‘친일재산환수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운암 김성숙기념 사업회는 이를 환영하는 환영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로부터 친일후 손들에 대한 재산환수를 통해 독립운동가후손들을 위한 차선책을 마 련할 것을 촉구하였다.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는 그 이후에도 봉선 사 주지 철안스님, 총무국장 가산스님등 관계자들과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방문하여 기념사업회의 향후 방향을 논의하는 자리를 가 지는 등 더욱 활기를 띈 모습을 보여 왔다. 이 기념사업회의 추모열 사인 운암 김성숙 선생은 봉선사에서 승려를 지냈던 3.1운동 애국투 사로서 이번 사건에서 의미있는 역사적 주체라 할 수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쳐 투쟁하며 나라의 기틀을 세운 독립유 공자들에 대한 관심의 확대는 이 시대의 민주정치의 향방과 근본정신 을 가늠해볼 수 있는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운암은 ‘혁신계인사’ 또는 ‘중간파’로 분류되는 중심적 인물이 다. 한국 현대사의 굴절과 패배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이른바 ‘중간 파’의 몰락을 드는 이들이 많다. 해방 후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속 에서 설자리를 잃고 정치적 낭인으로 떠돌다 비참하게 생을 마친 이 들이 중간파이다. 중간파란 이름으로 묶여 소개되는 이들은 김성숙외 에 장건상, 원세 훈, 김창숙, 조완구, 안재홍, 유림, 김규식, 조소앙 등 9명이다. 그 들은 극좌, 극우의 편향성을 극복하고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통한 민족통일에 온 힘을 기울인 사람들로서, 친미적인 이승만 세력이나, 그에게 빌붙은 친일파들의 극우노선을 비판했고 박헌영의 극좌노선 도 따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우파는 이들을 기회주의적 친공산주의자로 몰 아붙였고 극좌파는 이들을 회색적 기회주의자로 비판했다. 이들이 정 말 기회주의자였을까? 그 해답을 풀기 위해서는 그들이 걸었던 삶의 지평을 따라가 봐야만 한다. 어린시절의 운암은 고향에 있는 대한독립학교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 들에 대해 공부하며 애국심을 키웠고, 한일합방 이후 독립학교가 문 을 닫고 일본의 보통학교가 들어서자, 학교에 가지 않고 할아버지로 부터 한문과 불교경전을 배우는 등 학문의 밑거름을 닦게 된다. 그 이후 대한제국때 정위(正尉)를 지내다 1907년 군대 해산 뒤 만주 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든 삼촌의 영향으로 운암은 독립운동에 가 담하게 된다. 독립군이 되려고 만주로 향하던 청년운암은 봉선사에 서 3년간 머물면서 운암은 경전을 공부하는 한편, 그곳에서 민족대 표 33인인 손병희(1861~1922)와 만해스님(1879~1944)도 만나 3.1운동 에 가담하게 된다. 이 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른다. 그가 석방돼 나올 무렵, 조선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퍼져있었고, 운암 은 1922년 무산자(無産者)동맹회와 조선노동공제회에 가담하게 된다. 운암은 자신이 사회주의에 발을 들인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 한다.“처음에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참여한다는 마음 에 가입했지만, 이 단체를 통해 사회주의 운동에 발을 들이게 됐 다.” 국내에서 일본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그는 1923년 스님5명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북경민국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연구하는 등 학문적 기틀을 다져가는 한편, 장건상(張建想. 1882~1974), 양명(梁 明), 장지락(張志樂. 1905~1938)등과 함께 창일당(倉一黨)을 조직하 고 이란 잡지를 발행한다. 또한, ‘조선의열단’에 가입한후, 1926년 광동으로 가서 광동코뮨 에 참가했다가 실패한 이후 상해로 돌아와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 일운동을 계속했다. 1936년 중국각지의 동지를 모아 ‘조선민족해방 동맹’을 조직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 성하고, 1938년에는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과 함께 ‘조선 의용대’를 조직,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겸임했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한 그는 1943년 대한민국임 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귀국했으나 1946년 임정이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위원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해 임정을 떠났다. 1961년 5.16 군사 쿠테타 이후 이른바 혁신계 인사로 낙인찍힌 그는 ‘반국가행위’를 저질렀다는 죄로 10개월간 감옥에서 지내게 된다. 그나마 환갑이 넘고, 임정의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유공자임이 참작 돼 석방될 수 있었지만, 말년에 천식으로 고생했던 그는 가난 때문 에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파란만장하고 고단한 삶 속에서 그가 꿈꾼 것은 독립, 통일, 민주화였다. 「아리랑」,「혁명가들의 항일회상」 운암 김성숙 선생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오늘날의 민족적 가치 관에 이바지하고자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는 설립되었다. 지난 1월 6일에 찾았던 운암 김성숙기념사업회는 운암김성숙의 넋을 기리고, 역사적 재조명의 기회를 찾을만한 야심찬 연계사업을 기획중 이었다. 주요사업으로는, 운암기념관, 일제시대의 거리를 복원한 시대물 전용 세트장 건립, 호국 불교관, 봉선수련원 건립(숙박시설 포함), 유스호 스텔, 전통 민속체험공원, 운암시민공원(조각공원과 체육공원, 놀이 공원을 포함)등을 다양하게 갖춘 ‘운암테마파크’건립이 있고, 유적 지 발굴과 복원과 함께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며, 교육, 사 회, 언론, 청렴공무원, 문화, 산업기술등 6개분야각계의 추천을 받 아 ‘김성숙 상’을 수여할 계획에 있다. 이러한 추모사업은 또한, 운암 김성숙 선생의 중국인 부인(두군혜 여 사)사이에 둔 세아들인, 두젠(두젠-음악가), 두감(두감-전 북경대 교 수), 두렌(두렌-중국국가발전개혁위원회 정보센터 부주임)이 맡은 중 국측 사업회와 함께 연계하여 각종 지원사업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 다. 현재 운암 김성숙기념사업위원을 맡고 있는 운암 김성숙 선생의 외손 자인 민성진사무국장, 그리고 엄선하 교육팀장은 국가보훈처에 사단 법인을 등록할 예정이며, “20만평부지에 세워질 테마파크 건립지로 서 운암선생이 머리를 깎은 곳인 용문사와 봉선사가 있는 남양주시 를 염두해두고 있다고 전했다. 운암 김성숙기념사업회를 운영하면서 어려운 점을 묻자, 민 사무국장 은 국가보훈처의 사업지원정책의 기준이 ‘재력이 어느 정도 뒷받침 되고 있는 사업’, ‘특정기념사업"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 등을 예 로 들면서 아쉬움을 표명했다. 운암 김성숙은 역사적 사료가 증명하듯이,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고, 자유와 평등을 염원한 독립투쟁운동가였다. 그동안 사회주의 운동가 로 낙인찍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민족애를 향해 뜨겁게 불탔던 ‘운암’의 초아를 떠올리며, 애국투사들의 깊은 숭고의 정신의 산실 로서의 운암김성숙사업을 마음속으로나마 회부해본다. 취재|오진선기자, 사진|최병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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