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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경기북부 국찰,봉선사
관리자
조회수 : 3627   |   2005-12-08


고 있는 지 리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땅이다. 특히 도성에서 100리 안에 왕릉이 만들어진 점에서 경기도는 "왕릉의 땅"이다. 조선의 왕릉은 강원도 영월 땅에 있는 단종의 장릉(莊陵)을 제외하고 38선 이북 정종의 후 릉(厚陵)까지 포함해 모두 경기도 땅에 있다.   더욱이 조선 왕실의 대표적 능침이 구리·남양주에 몰려있는 만큼 능 침을 수호하는 원찰 또한 유별나다. 그 대표가 봉선사(奉先寺)지만 봉영사·봉인사 등의 "봉(奉)"자 돌림 의 사찰이 확연히 눈에 띄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세기로 들어오면 서 궁궐의 비빈과 상궁들의 원찰에 대한 시주는 이전 시기와 확연히 다르게 양성적인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한수 이북을 대표하는 사찰은 봉선사다. 봉선사를 찾아가 는 길은 울울한 광릉과 수목원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설렘으로 시작된 다. 물론 봉선사 아랫마을 능안마을의 구수하고 칼칼한 된장국과 텃밭에 서 기른 푸성귀를 뜯어다 내놓는 쌈밥 맛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겠지 만 말이다. 그 사하촌에서 100여m를 지나면 봉선사를 알리는 몇 기의 기념비를 만날 수 있다. "홍월초대선사 추모비"와 "봉선사사적기" "운허당대종 사"라 써 있는 운허 스님의 부도, 그리고 "춘원 이광수 기념"와 "이 월파 공덕비"까지. 봉선사의 근대를 온전히 보여주는 공간이 자리하 고 있다. 봉선사가 광릉의 원찰이 된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한국전 쟁 등 국난을 한번도 비켜가지 못하고 불탄 비운과 중건의 역사를 사 적지는 알려주고 있다. 봉선사가 서울 외곽의 춘천·포천 등 북방지 역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 마지막 총섭이었던 홍월초(洪月初, 1858∼1934)는 현 동국 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하는 등 근대 불교사의 큰 족적을 남긴 스님이다. 더욱이 자신의 전 재산을 봉선사에 헌납하여 "홍법강 원(弘法講院)"이라는 전문강원을 만들도록 함으로써 봉선사를 교학 의 근본도량으로 거듭나게 하는 등 봉선사의 중흥을 이끈 인물이기 도 하다. 그렇게 운허스님의 부도까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기념비와 는 달리 낯선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서 있다. 아마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서 있는 그의 기념비는 당시 봉선사의 주지였던 운허 스님 의 너른 품이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왜 친일을 이제 와서 문제 삼는지 몰라! 나라를 위해 뭔 이득 이 있다고?” 마치 우리에게 들으란 듯 춘원의 기념비 앞 연로한 세 어른들이 나누 는 말은 운허스님의 너른 품과 같은 의미일까? 춘원 이광수와 8촌 동갑내기였던 운허(耘虛, 1892∼1980), 즉 이학수 (李學洙)는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30세에 출가하여 월초 스님의 법손 으로 향후 봉선사를 이끌었던 당대의 고승이었다. 그러했기에 춘원 의 기념비를 세울 수 있었으니, 독립운동을 했던 자신의 떳떳함과 큰 스님으로서 걸림없는 무애, 친일파라 치부되었던 유약한 동갑내기 형 춘원에 대한 연민, 그리고 미국에서 살고 있던 춘원의 부인 허영 숙의 간곡한 부탁이 이루어낸 복잡한 산물인 것이다. 더욱이 세워진 시점이 1975년 가을이라는 것은 옆에 서 있는 월파(月 波)공덕비의 존재와 연결된다. 월파는 당시 유신체제의 정치적 실세 였던 "이후락"으로 봉선사의 대공덕주가 그와 그의 어머니였으니, 물 질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을 터. 그 자리에 혹여 님 웨일즈와 김산의 "아리랑"에 나오는 김충창, 즉 "운암 김성숙(金星淑, 1898∼1969)" 의 기념비를 꿈꾸는 것은 욕 심일까? 월초 스님에게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은 그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투쟁으로 일관했고, 해방 후에는 좌우합작 및 통일운동을, 5·16 이 후에는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길을 걸었던 그를 봉선사는 기억하고 기 념할 일이다. 일제강점기 친일문학작품을 가장 많이 남긴 문인은 단연 춘원 이광수 였다. 103편의 시와 소설 그리고 논설을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강고 한 지배에 대한 확신을 설파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 느날 불현듯 찾아온 해방은 경악 그 자체였고, 해방으로 운신의 폭 이 좁아진 춘원은 운허스님이 있는 봉선사를 근거로 인근 사릉 근처 에서 은거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 때의 친일행적 때문에 1949년 반민법에 의하여 구속되었 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다시 봉선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 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이북으로 끌려갔으니, 봉선사는 춘원의 굴절 많은 삶의 뒷모습을 지켜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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