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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 불교계 대표 항일투쟁가 운암 김성숙
관리자
조회수 : 3024   |   2005-12-08
鍮??출가 조선의열단-임시정부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운암(雲岩) 김성숙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불교계 대표적 항일 투쟁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한용운, 김법린 등과 함께 3·1만세 운동에 참가했는가하면 이후 조선의열단, 재중조선 총동맹, 조선의용대, 임시정부 등의 항일단체에 참가해 주 요 요직을 맡으면서 일본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 이기 때문이다.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성숙은 어릴 때 부터 가난과 함께 일본 식민통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하는 암울한 시대 상황과도 싸움을 해야만 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식민 통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16 년 김성숙은 집안의 삼촌이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 식을 접하고 독립군에 참가할 목적으로 집에서 땅을 판 돈을 훔쳐 만 18세의 나이에 집을 나섰다. 그러나 어린 김성숙에게는 만주라는 여정 이 너무나 멀었다. 결국 만주로 가는 중도에 어린 청년이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심한 한 어른에게 붙잡혀 다시 집으로 돌아올 형 편에 놓였다. 그러던 김성숙은 마침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새벽에 절을 나섰다가 한 스님을 만나 돌연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를 했다. 용문사에서 2년의 행자생활을 마친 김성숙은 이후 사미계를 받고 다 시 봉선사 강원에서 본격적으로 경학을 익혔다. 어릴 때부터 틈틈이 서당을 다니면서 한문을 익혀온 김성숙은 이런 까닭에 경전을 익히는 데 언제나 남들보다 앞섰다. 그러던 그는 당시 손병희, 한용운, 김법린 등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 던 을초 스님을 시봉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함께 독립 운동에 대 한 의지를 다시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후 3·1운동에 참가했던 김성숙 은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2여년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 다. 출옥 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 김성숙은 이후 1923년 중국으로 건너가 중산(中山)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의열 단, 재중조선총동맹, 중국 반제국주의 동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 민족전선연맹, 임시정부 등의 주요항일단체에 가입, 주요 요직을 맡으 면서 다양한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황야(荒野)」, 「혁명」등의 계몽 잡지를 발간해 민족계몽을 위한 수많은 논문을 발 표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김성숙은 미 군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 을 보이면서 좌익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그러면서 도 좌·우익 합작운동을 전개해 민족의 분열을 경계했다. 이후 자유당 과 군사 정권의 잇단 독재에 맞서 싸움을 계속하다 또다시 옥고를 겪 기도 했던 김성숙은 1969년 4월 12일 지병인 기관지염으로 결국 입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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