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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독립운동가 후손부터 아이돌까지... 독립선언문 낭독한 그들의 이야기
관리자
조회수 : 1203   |   2021-03-02


수많은 세계인들이 동참해 가능했던 독립... 오늘날 던지는 메시지

 

2021년 3월 1일, 102주년 3.1절 기념식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를 비롯해 50여 명이 참석한

행사는 빗줄기 속에서 차분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이날 순서 중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독립선언문 낭독이었다. 지난해 기념식에서 영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수어 등 여러

언어로 낭독되어 화제를 모은 바 있는 독립선언문 낭독은 올해도 마찬가지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수어로 낭독됐다.

모든 언어의 독립선언문은 고대의 한국어를 현대식으로 바꾼 '쉽게 바르게 읽는 독립선언문'에서 기안했다.

낭독자는 김원웅 광복회장과 일본인 최초 건국훈장을 받은 후세 다쓰지의 외손자 오이시 스스무, 항일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의 부인

두쥔체이의 손자 두닝우, 헤이그 특사의 일원인 이위중의 외증손녀 율리아 피스쿨로바, 의료수어 통역사 김선영 씨와 가수 전소미 등

7인이 맡았다. 이 중 오오시 스스무와 두닝우, 율리아 피스쿨로바는 코로나19로 직접 참석이 불가능해 온라인으로 참여했다.

낭독자 7인은 3.1절이 기념하는 역사적 의미와 사회의 발전을 상징하는 인물들로 선발됐다. 독립선언문을 읽은 낭독자 7인, 그들이 가지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미국의 특파원, 3.1운동을 전하다


  ⓒ KTV 

    ⓒ 문화재청  

사람마다 저마다 인격을 발달시키고 우리 가여운 자녀에게 고통스러운 유산 대신 완전한 행복을 주려면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낭독한 제니퍼 테일러는 AP통신의 전 특파원인 앨버트 테일러의 외손녀이다. 앨버트 테일러는 1919년 2월 아들의

출산을 위해 방문한 세브란스병원에서 독립선언문을 입수, 이를 전 세계에 보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같은 해 4월

일제가 제암리의 감리교회 교민들을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을 보도해 일제의 학살을 전 세계에 알렸다.

앨버트 테일러는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조선에 거주하며 언더우드 선교사 등과 함께 조선 총독을 항의 방문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그에게 일제는 강력한 탄압을 가했고 그는 1942년 추방되어 미국으로 되돌아갔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려고

시도했으나 일제의 입국금지 조치로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1948년 사망했다. 그러나 '조선에 묻히고 싶다' 는 그의 유언만은 이루어져, 그는

화장되어 양화진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앨버트 테일러의 외손녀 제니퍼 테일러는 2006년 아버지 브루스 테일러와 함께 아버지가 살았던 당시 서울의 집을 찾기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브루스 테일러는 앨버트 테일러의 아들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서울에서 출생해 아버지가 미국으로 추방되기 전인

1942년까지 조선에서 살았다. 이 후 브루스는 2015년 95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제니퍼 테일러는 이듬해인 2016년 앨버트 테일러의 생전

자료 1026건을 서울시에 기증했고 이 중 일부는 2018년 개최된 3.1운동 100주년 기념 기증유물특별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제니퍼 테일러는 독립선언문 구절 중 "우리에게 가장 급한 일은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를 뚜렷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세계에 알렸던 한민족의 목표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하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

독립운동을 도왔던 일본인


ⓒ KTV 

과감하게 오랜 잘못을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사이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이 서로 재앙을 피하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올해의 독립선언문도 일본어로 낭독됐다. 지난해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에 이은 올해의 일본어 낭독자는 바로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외손자 오오시 스스무다. 1919년 2월 8일, 재일조선유학생들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규탄하고 조선의 자주적 독립을 촉구하는 2.8 독립

선언문을 발표했다. 일본땅의 조선 청년들이 외친 독립을 향한 열망은 도화선이 되어 3.1 운동과 이후의 여러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2.8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이후 서명 의원을 포함한 유학생 27명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는 등 상황이 불리해지자

당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후세 다쓰지를 찾았다. 후세 다쓰지는 조선 청년들의 열망을 보고 감동받아 그들의 변호를 맡았고, 본래

내란죄로 기소되어 중범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있었던 조선 청년들은 후세 다쓰지의 변호로 7~9개월의 가벼운 금고형만 받게 됐다.

조선 청년들은 자신들의 존엄과 열망을 이해하고 존중해준 후세 다쓰지에게 존경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후세 다쓰지는

조선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으며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1925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제가 조선인들을 학살하자 "조선인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드린다"는 사죄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일제는 후시 다쓰지에게 미국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워 가혹한 탄압을 일삼았다. 후세 다쓰지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외손자인 오오시 스스무도 어린 시절 미국 스파이의 외손자라는 이유로 감시의 대상이 되고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바르고 약한 자를 도우며 평생을 바친 그는 탄압의 대상이 된 체 일생을 마쳤지만,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을 받는 등 역사의 승자로 영원히

기록되었다. 오오시 스스무는 2019년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의 신념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라는 말로 그의 역사적 공로를 강조했다.


오오시 스스무가 일본어로 읽은 독립선언문 구절 중 "사이 좋은 새 세상을 여는 것이 서로 재앙을 피하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임이 분명하지

않은가!"라는 메시지가 유독 와닿았다. 몇 년 동안 악화되고 있는 한일관계에 대한 100년 전 이들의 혜안이자 위대한 견해였다. 그들은 독립

운동을 통해 일본의 완전한 멸망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일본과의 화합을 바랐다. '사이 좋은 새 세상' 이라는 문장처럼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는 조선과 일본의 화합적 관계를 방해하는 요소였기에 그들은 독립운동에 평생을 쏟았다. 일본의 역사 왜곡과 이에 뒤따른

불매운동 등으로 한일관계가 냉각기를 가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100년 전 독립투사들이 외쳤던 '사이 좋은 새 세상'이라는 한 문장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의 딸'을 자처한 여성
  
     ⓒ KTV

    ⓒ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중국어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인물은 두줜훼이의 손자 두닝우다. 중국의 항일운동가 두줜훼이는 항일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의 부인

이다. 운암 선생은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한 항일운동가로서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이끌었고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는 데 앞장섰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해 한중 두 국가의 항일연대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여러 공적을 남겼다.

1929년 두쥔훼이는 김성숙과 결혼하고 자신을 '조선의 딸'로 지칭하면서 남편과 함께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두줜훼이는 1943년 2월부터

194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부 요원, 한국구제총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두줜훼이는 미주 한인잡지 <독립>에 기고한 논설에서

자신을 '조선의 딸'로 칭함과 동시에 "나는 늘 조선부녀들의 일을 나의 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하여야 우리 조선 부녀 동포들이 전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를 늘 생각하고 있다"는 말로 일제에 저항하던 독립운동가들과 동포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했다.

두줜훼이는 2016년 광복절 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건국훈장 수여 당시 한국을 찾아 할머니를 대신해 훈장을 수여받았던 두닝우는 온라인으로 독립선언문을 읽었다.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의 대한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중국어로 낭독될 때,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하던 한국과

중국의 항일운동가들이 세운 공적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을사늑약에 저항한 헤이그 특사


     ⓒ KTV 

 아,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는구나. 힘으로 억누르는 시대가 가고 도의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오는 구나.

러시아어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율리아 피스쿨로바는 헤이그 특사로 잘 알려진 대한제국의 외교관 이위종의 외증손녀이다. 헤이그 특사는

1907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이를 무효로 하기 위해 고종의 친서를 들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으로 구성된 비밀 특사단을 말한다.

헤이그 특사 3명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입장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비밀초대장을 보낸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할 계획이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그들은 회의장 입장을 거부당하고 친서 전달도 실패하게 된다. 이위종은 입장을 거부당한 후 한

영국의 언론인과의 인터뷰에서 "왜 차라리 솔직하게 총, 칼이 당신들의 유일한 법전이며 강한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고 고백하지 못하는

겁니까?"라며 일제와 일제의 압력에 굴복한 평화회의 참가국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만국평화회의 입장을 거절당한 후 분을 이기지 못한 이준 열사는 자결했고, 남은 이상설과 이위종은 미국으로 건너가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이위종은 러시아로 돌아가 귀화했고 그 후의 행적과 최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헤이그 특사 3명이 입장을 저지당한 건 일제의 대한제국 주권 침탈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3년 후인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제에 완전히 합병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율리아 피스쿨로바가 러시아어로 읽은 "아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는구나!"는 아마 헤이그로 파견갔던 3명이 그토록 외치고 싶었던

문장이었을지 모른다. 헤이그 특사로 나라가 빼앗기고 있다는 걸 몸소 경험한 이들에게 일제의 간섭이 없는 우리 민족의 국가, 조선의

독립은 절실히 경험하고 싶었을 새로운 세상이었다. 

국내에 단 3명 뿐인 의료수어통역사


  ⓒ KTV 

온 세상의 도리가 다시 살아나는 지금 세계 변화의 흐름에 올라탄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수어로 전달된 독립선언문도 큰 의미가 있었다. 수어로 독립선언문을 전달한 사람은 김선영 의료수어통역사다.

의료수어통역사는 수어 통역사 중에서 의료에 대한 전문적인 수어통역을 담당하는 수어통역사로, 김선영 통역사는 국내에 단 3명 뿐인

의료수어통역사이자 상급종합병원 내에서는 유일한 의료수어통역사이다. 

김선영 통역사의 하루는 온전히 청각장애인의 목소리가 되어주는 데 쓰인다. 청각장애인 환자가 병원에 진료를 위해 방문하면 먼저 영상

통화를 통해 수어로 환자의 증상과 진료 계획 등을 설명하고, 이후 함께 진료실로 이동해 담당 의사에게 환자의 상태를 전달한다.국내

병원에서 잘 보기 힘든 의료수어통역사이다보니 청각장애인 중에서는 진료받기 편한다는 이유로 김 통역사가 근무하는 병원을 자주

찾는 환자들도 생길 정도다.

김 통역사는 과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수어통역사가 전국광역시 단위로 접근성이 좋은 곳에 한 명씩이라도 배치됐으면 한다"라며

청각장애인 환자들의 수월한 병원이용이 가능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치기도 했다.

의료계가 겪고 있는 최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김선영 통역사가 전달하는 독립선언문은 더욱 뭉클하게 다가

왔다. 김 통역사가 읽은 독립선언문의 구절 중 하나인 "우리는 주저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결의에 찬 다짐은 코로나19에 대항하고

있는 그녀와 모든 의료인들의 자세처럼 느껴졌다. 눈빛과 감정만으로도 용맹함은 그대로 전해져왔다. 100년 전 독립운동이라는 거대한

싸움을 치뤄냈던 독립운동가들의 결연함은 현 시점에서 코로나19라는 재난과 싸우고 있는 그녀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케이팝과 다문화의 대표, 전소미

  ⓒ KTV 

수천 년 조상의 영혼이 안에서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기운이 밖에서 우리를 지켜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뿐이다.  

 

가수 전소미는 케이팝 열풍을 이끄는 인기 가수이자 한국 다문화의 대표로서 초청되어 독립선언문을 읽었다. 2016년 걸그룹 아이오아이의

멤버로 데뷔한 전소미는 뛰어난 가창력과 화려한 안무,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 시장을 이끄는 선두주자로

여겨져왔다. 케이팝 문화가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끼치고 있는 영향은 현대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전소미는 또한 캐나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다문화 자녀이기도 하다. 전소미는 과거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문화 자녀로서

겪은 차별을 고백하며 "어린 시절 외모 때문에 따돌림을 당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전소미는 음악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자신을 차별하던

사회를 바꾸고 움직이는 주축이 되었다. 글로벌 시대에 맞는 사회의 근본적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전소미의

모습은 그 본질을 잘 말해준다. 

"다만 저 앞의 밝은 빛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뿐이다"라는 말에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독립선언문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있다. 한국 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전소미가 이 구절을 읽고 있는 모습은 독립선언문이 구현하고 싶었던 사회의 한 예시이기도 하다. 한국 문화의 중심

으로 자리잡은 케이팝 시장의 아이콘으로서, 또 다문화의 대표로서 전소미는 미래 시대를 위한 지향점으로 우뚝섰다.

낭독자들 모두 각자의 언어와 고유의 영향력을 지니고 독립선언문 앞에 섰다. 이번 3.1절 기념식에서의 낭독이 의미하는 건 독립선언문이 단순한

일제 타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독립운동을 통한 사회의 발전과 미래를 향한 고찰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조선의 독립은 한국인들만의 투쟁만

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파괴하는 일제에 반대했던, 수많은 세계인들이 함께 동참하여 가능했다는 중요한 메시지도 던졌다.

독립을 바라는 함성소리가 거리를 울린 지 어느덧 102년이 지난 지금, 이들에 의해 낭독되어진 독립선언문은 한국 사회에 102년 전 그날처럼

무거운 외침을 던지고 있다.


◎ 출처 : 오마이뉴스 허 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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