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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죽산 조봉암 손녀 "독립유공자 서훈 더는 신청하지 않을 것"
관리자
조회수 : 2   |   2019-08-14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제 [연합뉴스 자료사진] 

 

 

 

 

 

항일운동하다 사법살인 희생양됐지만 친일 이유로 서훈 반려
유족 "올해 석상 건립..기억하고 기금내준 시민들께 감사"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사법 살인의 희생양이었던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 죽산 조봉암 선생이 간첩 누명을 벗은 지 8년이 흘렀지만 유족의 응어리는 여전했다.

 

조봉암 선생의 손녀 이성란(59)씨는 제73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거의 30년 넘게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 자체를 못 했던 상황이었다"며 "어머니는 늘 무언의 압력에 눌려 사시는 듯했다"고 털어놨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이 죽산에 대한 재심 선고를 내리기로 한 날 그의 장녀 조호정(91) 여사는 아침 일찍 '일어날 수가 없다'며 다른 가족에게 연락했다고 한다.

 

유족들 모두 죽산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씨는 "어머니가 나중에 말씀하시길 '아버지가 재판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던 날이 떠올라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고 하더라"며 "몇십 년이 지나도 당신 머리에선 그 아팠던 기억이 전혀 떠나질 않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당시 대법원 재판부는 "죽산은 독립운동가이면서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 등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지만 잘못된 판결로 사형이 집행됐다"며 그의 간첩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사형 집행 52년 만이었다.

 

그렇게 힘겹게 얻어낸 무죄 선고였지만 완전한 복권은 요원한 일이 됐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문제였다.

 

죽산의 문중은 2011년 무죄 선고 직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냈지만 친일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1940년 1월 매일신보에 실린 '인천부 본정 내외미곡직수입 성관사 조봉암 방원영'이라는 광고와 이듬해 12월 같은 신문에 실린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는 휼병금(장병 위로금) 150원을 냈다'는 내용의 기사가 그 이유였다. 



 

 

 

죽산 선생 추모제에서 발언하는 손녀 이성란(59)씨 [이성란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15년 낸 재심 신청도 같은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훈처는 지난해 자체 심의를 했다며 유족 측에 의견을 알려왔지만 역시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이씨는 "유족들은 더는 서훈 신청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왜곡된 신문에 나온 단편적인 한 줄짜리 기사를 가지고 친일 행위로 매도하는데 이 상황에서 서훈 신청을 또 하는 것은 할아버지에게 오히려 누가 되는 행위라고 본다"고 질타했다.

 

죽산의 손녀사위인 유수현(66)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역시 "죽산이 살았다는 주소도 틀리고 성관사라는 업체도 소유한 적이 없었다"며 기사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죽산의 생애를 연구한 끝에 '조봉암 연구'를 집필한 박태균 서울대 교수는 '1940년대 들어 쟁쟁한 공산주의자가 전향한 것이 사실이며 이들이 쓴 전향서는 대대적으로 발표돼 선전 자료로 사용됐다'며 '죽산이 전향했다면 선전으로 이용됐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가 친일 성명이나 반공산주의를 천명한 단편적인 기록조차 발견할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대신 유족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죽산을 기억하는 시민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인천 새얼문화재단은 2011년부터 모은 기금 8억5천여만원으로 올해 하반기 인천에 죽산 선생의 석상을 건립할 계획이다. 전국 각지에서 5천554명 시민이 정성을 보탰다.

 

이씨는 "가을쯤에는 석상 건립 과정이 시작될 것 같다"며 "할아버지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시민들에게 더없이 감사한 마음뿐이고 모금까지 해 주신 데 대해 한편으로 죄송스럽기까지 하다"고 마음을 전했다.

 

죽산 선생은 1899년 인천 강화도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919년 3.1운동 당시 강화도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그는 치열한 항일 운동을 벌이다가 1932년에는 7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과 국회 부의장을 지내고 진보당을 창당했지만, 1958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등으로 기소됐다.

 

2심과 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형이 집행되면서 형장의 이슬이 됐다.

 

이후 유족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인 대법원이 2년여의 심리 끝에 무죄 판결을 내려 사형 집행 52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나라 헌정사상 첫 사법 살인으로 기록됐다.

 

chams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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