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보센터
  • 언론속의 운암

언론속의 운암

게시판 내용
[세계일보] 피아니스트 두닝우 "나의 꿈은 한국 스타일의 협주곡 작곡"
관리자
조회수 : 2206   |   2019-07-14


11일 오후 중국 광저우 한 호텔에서 외교부공동취재단과 간담회를 갖고 있는 운암 김성숙 선생의 장손 피아니스트 두닝우 씨. 앞서 두씨는 한중우호카라반 국민대표단 청년들 앞에서 아리랑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광저우=외교부공동취재단 

 

 

한중우호카라반 국민대표단 앞에서 아리랑 연주 

 

지난 11일 오후 광저우 한 호텔에서 만난 운암 김성숙 선생 장손 피아니스트 두닝우(53)씨는 ‘기회가 되면 피아노곡으로 편곡해보고 싶은 한국 음악이 뭐냐’는 질문에 “이름은 잘 모르겠다”며 진도아리랑을 콧노래로 불렀다. 그는 이날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해 그 흔적을 찾기 위해 광저우에 도착한 한중우호카라반 국민대표단 청년들 앞에서 아리랑(경기아리랑)을 피아노로 연주했다. 아내 심혜련 씨와는 함께 3·1운동의 노래를 협연했다. 그의 꿈은 한국의 색이 묻어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는 것이다.   


김씨가 될 뻔한 그의 성은 중국인 할머니 두쥔후이(杜君慧) 선생의 성을 딴 두씨다. 남편과 함께 여성혁명가로서 독립운동에 기여한 그에게 국가보훈처는 지난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재중사학자 강정애씨에 따르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김성숙 선생이 해방 이후 귀국한 뒤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자 갖은 고초를 겪으며 세 아들을 키워야 했던 두쥔후이 여사는 중국에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아들들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꿨다. 두씨 아버지는 광동성교향악단을 30년간 지휘한 두감씨다. 

 
두씨는 한국어를 하지 못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들은 할아버지 김성숙 선생의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2002년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두씨는 현재 음악을 통해 할아버지의 조국과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인 중국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김 씨와의 일문일답.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을 것 같다.
 
“몇가지 기억에 남는게 있다. 주로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할아버지가 임시정부 국무위원 하실 때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항상 먹을게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먹을 음식을 아이들에게 주고 본인은 굶으시고, 글을 쓰시는데 배가 고프니까 배 앞에 베개를 붙여놓고 글을 쓰셨다고 한다. 하루는 김원봉 장군이 집에 오셨는데, 아버지가 여섯살 때였는데 서양과자를 가져와서 기쁘게 받았다고 하신다.”
 
―할아버지가 한국에 가셨다가 다시 중국에 오셨는데 할머니와 세 아들들을 다시 못 보셨나.
 
“할아버지는 중국에 돌아오시지 않았다. 할머니가 서운해하셨다.”
 
―독립운동을 하면 집에 음악을 할 여유가 없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영향을 받았나.
 
“아버지 어머니는 원래 작곡을 하셨다. 그분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전 광동성교향악단 지휘자 두감씨)는 18세부터 음악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는데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게 있다면.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것은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이기적이지 않은 삶을 배웠다.”
 
―아름다운 삶이란.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넘어 정신적으로 뭔가를 추구하는 것을 아름답다고 표현하고 싶다. 그때는 독립운동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서 추구했지만 현대에서는 다른 의미 있는 삶을 선택하면 된다.”
 
―처음 한국에 온게 언젠가.
 
“2002년이다. KBS 해외동포상을 받으러 올해 4월에 한국을 찾기 전 2009년에도 한번 더 광주에 음악회를 하러 갔다.”
 
―한국에 여전히 관심이 많은지.
 
“저는 정치에 관심이 많다. 소식을 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중 관계가 나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안 좋다. 한국과 중국의 우호가 좋아지고 점점 나아지길 바랄 뿐이다.”
 
―한국과의 교류 계획은.
 
“한국에는 언제든지 다시 가고 싶다. 최근 다큐멘터리 하는 한국인과 친구가 됐다. 그 친구가 아버지에 관한 것, 저에 관한 것을 찍고 싶어한다. 그런 건 언제든지 길이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KBS와도 오케스트라 합주 등을 하자고 말씀드렸다.”
 
―가족들이 보관하는 할아버지 유품이 있는지.
 
“할아버지가 보내신 편지가 있다. 1930년대에 쓴 것들이다. 할아버지가 글씨를 굉장히 잘 쓰셨다. 만년필로 쓴 것이 있다.”
 
광저우=외교부공동취재단, 홍주형 기자 jhh@segye.com 

 

 

 

 

         


file0 File #1   |   세계.jpg
게시판 이전/다음글
이전글 [뉴시스] 독립운동가 후손들 "선현 피와 맞바꾼 부국강병..역사 기억해야"
다음글 [세계일보] 임시정부 100년.. "한·중 우의 앞으로도 100년 이어가길"